삼성전자 파운드리에 첨단 인공지능(AI) 칩 제조를 맡긴 미국 반도체 스타트업 그로크(Groq)가 블랙록·시스코·삼성전자 등에서 8800억원 투자를 유치했다. 이 회사는 올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칩 대량 판매 계약을 맺었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독점 철옹성이 좀처럼 뚫리지 않는 가운데, 오일 머니의 낙점을 받은 스타트업들이 살아남아 대항마로 커가는 모양새다.
7일 조나단 로스 그로크 최고경영자(CEO)는 중앙일보에 6억4000만 달러(약 8800억원) 시리즈 D 투자 유치를 밝히며 “내년 1분기까지 10만8000개의 언어처리장치(LPU)를 배포할 계획인데, 수요에 따라 연내 150만 개까지 확장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번 투자에는 삼성전자 혁신센터(SSIC) 산하 펀드인 삼성캐털리스트펀드가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기업가치로 28억 달러(약 3조8500억원)를 인정받으며 3년 만에 두 배가 됐다. 그로크는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짓고 있는 첨단 파운드리 공장 4나노 공정(SF4X)에서 차세대 칩을 생산할 예정이다.
‘엔비디아 대항마’ 생명줄은 오일머니
그러나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해서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은 엔비디아가 장악한 AI 반도체 시장에서 좀처럼 대형 고객을 확보하지 못했다. 영국 정부의 수퍼컴퓨터 구축 사업조차, 영국 기업 그래프코어가 아닌 엔비디아가 수주했을 정도다. 그래프코어는 메타 등으로 기술진이 대거 이직한 뒤 지난달 소프트뱅크에 매각됐다.
구원의 손길은 중동에서 왔다. AI를 석유 다음의 먹거리로 삼으려는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등이 AI 연산 인프라 구축 등에 지갑을 열고 있다. 그로크는 지난 3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와 AI 인프라 구축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아람코는 세계 시가총액 5위 기업으로, 최근에는 오일머니를 디지털 전환에 투자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세레브라스는 UAE 기업 G42와 계약을 맺었는데, 대당 1억 달러(약 1400억원)의 수퍼컴퓨터를 최대 9대까지 구축하는 내용이다. G42는 UAE 왕세제가 소유한 회사로, UAE 국가 차원의 AI 도입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을 통해 AI 기술·반도체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미국 정부의 의혹을 불식시키는 노력도 하고 있다. G42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경영 참여 투자자로 받아들였고, 세레브라스·그로크는 모든 칩 제조를 미국 내 공장에서 해결한다. 조나단 로스 그로크 CEO는 지난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TSMC가 아닌 삼성 파운드리를 택한 이유에 대해 “미국 내에 4나노 공정 대규모 제조 역량을 갖춘 회사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HBM 없는 AI 칩’투자하는 삼성
엔비디아가 GPU 시장을 장악한데다 HBM 공급량도 빠듯하기에, 그로크 외에 텐스토렌트·삼바노바 등도 HBM을 아예 쓰지 않거나 탑재량을 줄인 구조의 특화된 AI 칩을 내놓고 있다. 삼성캐털리스트는 텐스토렌트와 삼바노바에도 투자했다. 다만 아직 엔비디아 GPU의 아성에 흠집을 내는 스타트업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