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3000만원 버렸다, 서대문 여성복샵 800벌 없앤 사연

밀실은 ‘중앙일보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 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촬영 당일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머리를 세팅하고, 피부결을 정돈하고 (중략) 허리가 들어간, 몸매보정이 잘된다며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던 딱 달라붙은 연분홍빛 원피스와 치마를 빌리거나 구매한다"
 
지난 5월 한 대학교에 붙은 대자보 내용입니다. '대학 내 기형적인 졸업사진 문화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글인데요. 이 글엔 "현재 대학 졸업사진 문화의 많은 부분은 여성을 외모 코르셋으로 억압하고, 여성 신체를 상품화하여 전시한다"고 적혀있습니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 남학생들은 검은 수트를, 여학생들은 원피스를 입는 모습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최소 5만원에서 비싸면 20만원까지 하는 전문 메이크업을 받기도 하죠. 이런 문화에 반기를 든 겁니다.
 
이른바 탈코르셋.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여성에게 당연시됐던 화장, 치마, 머리 스타일 등을 거부하는 페미니즘 운동이죠. 줄여서 '탈코'라고도 부릅니다. 삭발해야 탈코인지, 단발만 해도 탈코인지 그 기준에 대해선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이긴 한데요.
 
이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당당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도 계실 테고, 뚱뚱한 '쿵쾅'의 이미지가 머리를 스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운동이 수면위로 떠오른 지 약 1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지난해 SNS에 올라온 탈코르셋 인증샷.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해 SNS에 올라온 탈코르셋 인증샷.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졸업사진, 입는 옷에 따라 요구하는 포즈도 달라"

배유경씨(오른쪽)은 졸업사진 복장으로 남성(왼쪽)과 동일한 정장을 착용했다. 뒷모습을 보면 두 사람의 복장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지아 기자

배유경씨(오른쪽)은 졸업사진 복장으로 남성(왼쪽)과 동일한 정장을 착용했다. 뒷모습을 보면 두 사람의 복장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지아 기자

 
코르셋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원피스가 아닌 수트를 입고 졸업사진 촬영을 하는 학생들도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밀실팀은 지난달 19일 2학기 졸업사진 촬영이 진행 중이던 고려대를 방문해 졸업사진 복장으로 수트를 선택한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이날 캠퍼스에서 만난 배유경(22)씨는 검은색 바지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요. 배씨는 “공주풍 드레스는 졸업사진을 찍을 때밖에 못 입고 평상시에는 입기 힘들기 때문에 앞으로 면접,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수트를 구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그는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었을 때는 허리에 손을 올리라고 하지만 수트를 입었을 때는 팔짱을 껴보라고 하는 등 옷에 따라 사진사가 요구하는 포즈도 다르다”며 "더 자신감 있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다"며 웃었습니다.
 
같은 학교 재학생 김유빈(24)씨 역시 “졸업사진은 내가 기록되고 싶은 모습을 남기는 건데 치마가 아닌 바지 입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며 원피스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말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수트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는 학생들이 다수는 아닙니다. 이날 사진촬영을 담당한 A씨도 "유행이라고 하기엔 그 수가 많지 않고 이제 막 여학생들이 수트를 입기 시작한 정도"라고 했습니다. 또 수트를 입은 학생 중에서도 탈코르셋 차원이 아닌 단순히 멋내기 용으로 입은 학생들도 있었죠.  
 
이에 김씨는 “치마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는 것도 개인의 자유"라며 "다만, 나처럼 바지를 입고 사진 찍는 사람도 있어야 나중에 바지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싶은 후배들이 망설이지 않고 용기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000만원 여성복 폐기하고 ‘여남 공용옷' 팔아’"  

서대문구에서 여성복 전문점을 운영하던 심은섭(왼쪽)씨와 심혜섭(오른쪽)씨는 책 '탈코일기'를 접하고 자신들이 팔고있던 옷을 폐기했다. [심은섭, 심혜섭씨 제공]

서대문구에서 여성복 전문점을 운영하던 심은섭(왼쪽)씨와 심혜섭(오른쪽)씨는 책 '탈코일기'를 접하고 자신들이 팔고있던 옷을 폐기했다. [심은섭, 심혜섭씨 제공]

 
졸업사진뿐 아니라 평상복에도 변화가 있었는데요. 기존 여성복에서 탈피해 남성복으로 제작된 옷 중 여성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별해 판매하는 옷집도 생겼습니다. 이런 옷집을 만든 주인공은 자매 심은섭(27)씨와 심혜섭(25)씨입니다. 심 자매는 자신들이 판매하고 있는 옷을 ‘여남 공용옷’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여성복을 판매하던 이들이 이런 결심을 한 건 지난 7월. 심 자매는 "책 '탈코일기'를 읽고 가게를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며 "팔고 있던 여성복이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고 사람이 아닌 '인형'으로 보이게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과거엔 꽃무늬 블라우스, 시스루 원피스 등을 팔았다면 지금은 몸에 달라붙지 않는 넉넉한 셔츠, 큰 주머니가 있는 바지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남성복으로 제작된 기성복을 여성들도 입을 수 있도록 팔고 있는 거죠.
심 자매가 운영중인 옷집에서는 여성들도 입을 수 있는 '남성복'을 판매한다. 김지아 기자

심 자매가 운영중인 옷집에서는 여성들도 입을 수 있는 '남성복'을 판매한다. 김지아 기자

심은섭씨는 "여성복을 판매할 때는 불만이 많이 있었다"며 "프리사이즈라고 파는 여성복은 44반·55반 사이즈고, 내 허리 25인치인데 스몰 사이즈도 안 맞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성복의 마감처리, 재질 등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는데요. 심혜섭씨는 "여성복은 남성복과 비교하면 마감처리도 부실하고 바지 주머니도 없거나 매우 작다"며 "어머니가 남성복을 입어보고 하신 첫 마디가 '어, 이 옷은 주머니가 있네'였다"고 했습니다. 또 그는 "'사탕 껍질'같은 블라우스는 재질이 약해 원가가 싼 옷이 아니더라도 착용하다 찢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들은 "졸업사진, 졸업식용 바지정장을 사려는 고객들도 꽤 있다"며 "특히 AOA가 수트를 입고 공연한 '너나해' 무대가 방영된 다음 날엔 검은 수트를 찾는 이들이 늘어 재고가 바닥났다"고 변하고 있는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는데요.  
 
페미니즘 관련 사업과 관련해선 '페미 코인'이라는 비판도 있기 마련.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요. 심은섭씨는 "우리의 목적이 돈인지 아닌지 그 진정성은 소비자분들이 제일 잘 아실 것"이라며 "기존 여성복을 선호하던 단골손님도 잃었고 여성복을 파는 게 돈은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이들이 옷집의 컨셉을 바꾸면서 폐기한 여성복은 약 800벌, 금액으로 따지면 약 3000만원입니다.
지난 7월 심 자매가 가게 컨셉을 바꾸기 전에 팔았던 여성복들. 김지아 기자

지난 7월 심 자매가 가게 컨셉을 바꾸기 전에 팔았던 여성복들. 김지아 기자

 
그럼에도 이들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심은섭씨는 "시간이 갈수록 가게를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만 든다"며 "우리는 국내 의류업계로 보면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데 이 출발이 큰 변화의 시작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심은섭씨는 "탈코르셋에 관심이 있는 고객들이 이곳에 와 고민 상담을 하면서 종종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며 "탈코르셋에 관심 있는 사람끼리 서로 응원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지아·최연수·편광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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