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우리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미국의 역할이 높은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며 “필리핀은 당신의 파트너이며 동맹이자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중국해에서의 항행과 비행의 자유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보냈다.

지난 19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를 방문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은 지난 6월 30일 취임한 마르코스의 첫 비(非)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방문국이다. 전임 두테르테와 달리 취임 직후 미국을 최우선 순방지로 택하며 필리핀 외교 전통을 부활한 것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취임 직후 첫 해외순방국으로 중국을 선택하고 “필리핀은 미국과 분리된 나라”라고 선언한 뒤, 재임 기간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美와 동반하지 않는 미래 상상못해”

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오른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페이스북 캡처
‘친중’ 두테르테와 연합한 마르코스

사라 두테르테 필리핀 부통령(왼쪽)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함께 손을 잡고 지지자들에게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법원 판결로 15년간 미국 못 가

아버지 마르코스 시니어(오른쪽)와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의 1972년 모습. AP=연합뉴스
반면 미국과는 ‘악연’이 있다. 지난 1995년 하와이 지방법원은 아버지 재임 시절(1965~1986년) 마르코스 일가가 모은 20억 달러(약 2조8200억원)의 재산을 독재 치하에 고통받은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필리핀 하원의원이던 마르코스는 이를 거부하다가 법정모독죄까지 선고받았다. 이 판결로 인해 1997년 이후 15년째 미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번 방미도 “국가 원수는 외교적 면책권을 지닌다”는 미국 정부의 유권 해석 덕에 가능했다.
경제와 반중정서에 美 구애하는 마르코스

지난해 4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 시민이 중국 오성홍기에 "중국은 서필리핀해에서 나가라"는 구호를 적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서필리핀해로 부르는 남중국해에 대해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는 지난 2016년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남중국해가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필리핀 국민 사이에서 커져 있는 ‘반중 정서’를 고려한 행보라는 분석도 나온다. 더 디플로맷은 “필리핀인들은 필리핀 해역을 가로질러 은밀히 침투하는 중국의 존재에 대해 초조해한다”며 “마르코스는 국내에 만연한 반중국 정서를 고려할 때 전임자처럼 중국과의 노골적인 우호 관계를 이어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번 유엔총회 연설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은 “남중국해 논란 등은 국제법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향해 구단선(중국이 주장하는 남중국해 해상 경계선)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 판결을 수용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불편한 중국…동남아 미·중 구도 격변 오나

지난 7월 필리핀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필리핀의 외교 노선 변화는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대결 구도에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미·중 양국의 외교전은 필리핀뿐 아니라 동남아 전체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미국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의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PGII)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로 아세안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필리핀의 과감한 행동이 격화되는 미·중간 대결 구도를 흔든다면 줄타기 외교 속에 이득을 취했던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선택의 시간’에 내몰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