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미 정부의 기밀문건 유출이 동맹국과의 외교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AP=연합뉴스
NYT에 따르면 유출된 문건에는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 온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일 탄약을 미국에 공급할지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담겼다. 외교당국자들은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이 문제를 두고 압박할까 봐 우려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최근 사임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국가안보실 외교비서관 등 외교안보 고위관계자들이 지난 3월 초 나눈 기밀 대화 내용이 미 당국에 흘러들어갔다.
NYT에 따르면 이 전 비서관은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포탄을 제공할 경우, 정부는 미국이 '최종 사용자'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비서관은 또 한국 정부가 분명한 방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양국 간 정상이 통화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어길 수는 없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정책 변경을 할 것을 주장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실장은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발표와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 관련 입장 변경 발표가 같은 시기에 이뤄질 경우 '(무기를 주고 국빈 방문을 얻는) 거래'로 보일 수 있음을 우려했다고 한다. 때문에 폴란드를 통해 155㎜ 포탄 33만발을 '우회 공급'하는 방법을 제안했다는 것이 NYT의 보도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는 26일 미국을 방문하며, 이 사실은 지난 3월 7일 발표됐다.
NYT는 이 대화 내용을 미 정부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와 관련, '신호정보(SIGINT·시긴트)'를 통해 확보했다는 표현이 쓰인 문건이 있다고 보도했다. 정보기관이 도·감청에 나설 경우 통상 '시긴트'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워싱턴포스트(WP) 역시 "3월 초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제공하라는 미국의 요청에 고심했다"며 "한국의 국가안보실장이 서방 무기의 주요 허브인 폴란드에 포탄을 판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 미 국방부는 기밀문건 유출 경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AFP=연합뉴스
앞서 지난 6일 NYT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비밀리에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지원 계획이 담긴 기밀문건이 트위터와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비롯해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ian) 등에서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출된 문건에는 서방의 우크라이나군 증강과 무기 보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외에도 우크라이나군의 부대·장비·훈련 목록, 다연장로켓인 고속기동포병로켓체계(HIMARSㆍ하이마스)의 탄 소진 속도 등이 담겨 있었다.
미 국방부가 부랴부랴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온라인에 게시된 문건을 모두 삭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음날인 7일, 중국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군사 기지 정보 등이 담긴 기밀문건 역시 퍼지고 있단 사실이 추가로 알려졌다. 북한 핵 관련 정황이 담긴 문서도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의 우크라이나군. AFP=연합뉴스
군사·안보 전문가들은 유출의 배후에 친러시아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리인 믹 멀로이는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우크라이나와 미국, 나토에 피해를 주고자 하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 같다"고 NYT에 말했다. 우크라이나 측에선 러시아가 위조문서를 만들어 퍼뜨렸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확인된 문서들은 '빙산의 일각'이며 더 많은 문서가 이미 유출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러시아군이 개입해 문서를 조작·수정해 퍼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우려하고 있다. 미 법무부는 국방부와 함께 유출 경로에 대해 수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