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룰 바뀐 반도체 전쟁
최첨단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반도체가 필요해졌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제조 방법은 물론 설계·소재·부품·장비·패키징까지 공급망 전반에서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은 패키징에서부터 변하고 있다. 패키징은 원래 웨이퍼(반도체 원판) 상태의 칩을 전자기기에 부착할 수 있도록 가공해 주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뒷부분을 뜻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구현을 위해 기기 속에서 저마다 역할을 해오던 CPU(중앙처리장치)와 GPU, D램 등 서로 다른 칩을 마치 한 몸처럼 구동시켜야 하게 되면서 패키징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쓰임이 서로 다른 반도체를 고층 건물처럼 쌓아 올려 엄청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첨단 패키징 기술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 배경이다. 엔비디아가 내년부터 생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AI 칩 ‘GH200’ 역시 CPU와 GPU, 메모리 반도체가 하나의 칩으로 합쳐진 주상복합 구조의 반도체다.
엔비디아·AMD·인텔 등 시스템 반도체만 만드는 곳이나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은 많지만, 이들 칩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 업계에서는 결국 TSMC·삼성전자·인텔 3곳 정도가 고난도 패키징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기업으로 남을 것으로 본다. 미래 반도체 시장의 최고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패키징 기술을 장악한 기업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 점쳐지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30일 “이제는 ‘칩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서 ‘얼마나 여러 칩을 잘 쌓아 올릴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패키징 시장은 2025년까지 649억 달러(약 86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D램 생산 + 패키징 한번에…삼성, 전략 바꿔 TSMC 추격
하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을 주도한 회사가 실질적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전(前)공정까지 모두 싹쓸이하는 파운드리 사업 구조를 고려하면 사실상 수백조원 규모의 시장이 첨단 패키징 기술에 달린 셈이다.

김경진 기자
삼성전자는 발상의 전환으로 추격에 나섰다. 경쟁사 중 유일하게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자사 메모리 반도체를 칩 생산 과정에서 함께 패키징해 주는 턴키(일괄 진행) 서비스를 최근 시작했다. 삼성은 앞서 상당수 패키징 작업을 대만 등 외부 후공정 전문 업체에 맡겼지만, 이제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직접 수행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SK하이닉스 역시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HBM을 생산하는 만큼 패키징 기술을 통해 자사 메모리 반도체 성능을 끌어올리는 연구에 투자 중이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최대 5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첨단 패키징 기술 확보를 위한 예비타당성조사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첨단 패키징은 지금까지 업계에 없었던 새로운 영역”이라고 했고,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첨단 패키징 장비와 관련 인력 등 기초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