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 통신은 20일 이번 사건을 맡은 미국 델라웨어주 연방법원 배심원단이 양측의 변론을 모두 듣고 19일(현지시간) 회의를 열었지만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에 배심원단은 20일(현지시간) 오전에 다시 모여 심의를 재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배심원단 결론이 수일내에 정해질 가능성이 큰 셈이다.
재판은 지난 10월 영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설계회사인 퀄컴에 반도체 설계자산(IP) 사용계약 해지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시작됐다. 10월 22일 Arm은 퀄컴에 라이선스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뜻을 전격 통보했다. 해지 효력은 이날 통보로부터 60일 뒤인 오는 22일까지다. 이 뉴스에 반도체 업계는 물론 주식시장까지 출렁였다.
‘세기의 재판’ Arm vs 퀄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재판이지만 핵심 쟁점은 하나다. 퀄컴과 퀄컴이 인수했던 칩 설계 스타트업 누비아가 이들 회사에 반도체 IP를 공급해왔던 Arm의 라이선스 계약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
Arm은 반도체 설계의 밑그림이 되는 IP를 고객사에 제공하고, 대신 사용료를 받아 수익을 내는 회사다. 각종 앱과 그래픽 처리 등을 담당하는 복잡한 스마트폰 두뇌 칩을 각 회사들이 맨땅에서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Arm이 설계 밑그림을 대신 해주는 셈. 이에 지난 몇 년 동안 퀄컴은 Arm의 최대 고객사였다. 로이터에 따르면 퀄컴이 Arm에 지불하는 수수료만 매년 3억 달러(약 4300억원)에 달한다.
퀄컴 “Arm 기술? 1%도 안 썼다”
오라이온은 명령어 세트 등 Arm의 설계자산을 일부 사용하긴 했지만, 그 동안의 퀄컴 칩과는 달리 Arm의 설계 블록을 초기 단계부터 쌓아 올린 결과물이다. 이번 주 재판에서 오라이온 아키텍처에 Arm의 기술이 얼마나 쓰였는지 묻는 질문에 퀄컴 측은 “1% 이하”라고 밝혔다. 사실상 “이제 Arm의 설계 밑그림을 가져다 쓸 일이 없어졌으니 사용료 계산 다시 하자”는 태도다.
Arm “퀄컴이 계약을 조롱한다”
싸움이 격해지면서 폭로전도 벌어졌다. 퀄컴 측에서 Arm이 고객에 설계 밑그림만 제공해왔던 것을 넘어, 직접 칩을 설계해 고객과 경쟁하려 차근차근 준비해왔다는 내용의 내부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반도체 업계의 스위스’였던 Arm이 직접 링으로 올라와 퀄컴·애플·삼성전자와 싸울 채비를 했다는 충격적 주장이었다. 르네 하스 Arm 최고경영자(CEO)는 “다양한 사업 기회를 검토했다”면서도 “현재로서는 고객과 경쟁할 의향이 없다”고 반박했다.
반도체 설계 못 하면 도태될 것
퀄컴 측 변호사가 전날 최후 변론에서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 사건의 결과가 반도체 업계에 미칠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퀄컴이 승리할 경우 새롭게 인정받은 독자적 설계를 바탕으로 스마트폰은 물론, PC 시장에서의 시장점유율을 늘릴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와 같은 스마트폰 제조사에 대한 퀄컴의 영향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당장 퀄컴의 새로운 오라이온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설계한 새 스마트폰 두뇌 칩이 내달 출시될 삼성 갤럭시S25 시리즈에 탑재된다. 퀄컴이 칩 신제품의 가격을 크게 올리면서 삼성도 가격 인상 외에 다른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더라도, 반도체 설계의 중요성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삼성은 올해에도 LSI사업부가 자체 설계한 스마트폰 두뇌 칩 엑시노스 2500을 삼성파운드리 3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에서 당초 계획대로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칩 설계를 할 줄 아는 기업과 그렇지 못해 남의 칩을 받아다가 써야 하는 기업 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것”이라며 “시스템 설계·개발 역량을 미리 키워두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