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는 주식회사가 빚을 갚거나, 신규 투자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자(금리)를 붙여 발행하는 채권이다. 신규 투자라면 다행이다. 기업 입장에선 장기 자금을 일시 조달할 수 있는 데다, 상환일·금리를 확정한 만큼 자금 계획을 세우기도 좋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빚을 빚으로 돌려막는 경우도 많다. 현금 흐름이 나쁜 부실 기업의 대규모 회사채 발행을 두고 “기업의 돈줄이 말라 붙었다”고 판단할 ‘리트머스지’로 보는 이유다.
겉으로만 보면 악조건 속에서도 연초 대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이 순항하는 모양새다. 5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3일까지 발행한 회사채 중 가장 규모가 큰 건 포스코(1조원)였다. 이어 SK하이닉스(7000억원), LG유플러스(6000억원), LG화학(6000억원), 현대제철(6000억원) 순이다. 대부분 수요 예측에서 공모액 이상으로 수요가 몰려 증액 발행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불황을 겪는 LG화학ㆍSK케미칼 등도 공모액을 훌쩍 뛰어넘는 자금을 확보했다.
배문성 라이프자산운용 이사는 “일반적으로 회사채 시장은 최근처럼 금리 인하 가능성이 보일 때 수요가 크다”며 “기관이 1월에 자금 집행을 시작하는 ‘연초 효과’와 1분기 금리 인하 기대감에 회사채 시장이 활기를 띠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온도 차’가 뚜렷했다. 회사채는 채권인 만큼 일반적으로 리스크(위험)가 높은 장기물 채권일수록 금리가 높다. 그런데 회사채 흥행을 뜯어봤더니 3년물 이하(단기물) 회사채 수요는 넉넉했지만, 5년물이나 10년물 이상 장기물 회사채는 금리가 높아도 인기가 시들했다.
예를 들어 LG화학의 경우 1조6750억원의 주문이 몰렸지만, 대다수는 3년물(1조2650억원) 수요였다. 대한항공도 모집액(1500억원) 대비 3배 넘는 주문이 3년물(5790억원)에 집중됐다. 5년물에는 500억원 모집에 810억원 주문을 받는 데 그쳤다. 쉽게 말해 기업의 ‘장기 전망’을 어둡게 봤다는 의미다.
김상만 하나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업종과 만기, 금리 수준에 따라 수요가 엇갈렸는데, 단기물 쏠림이 유독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이어 “투자자들이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릴 거라고 예상하는 데다 기업 신용등급 하향 기조도 뚜렷해 리스크가 있는 회사의 장기물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량 대기업과 달리 부실기업과 중소기업 등은 자금 조달이 더 어렵다. 올해 2월부터 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는 70조944억원에 달한다. 차환(신규 채권 발행)이나 상환 압박이 커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달 회사채 순발행액은 2조9498억원(금융투자협회)에 그쳤다. 지난해 1월(7조1047억원) 대비 58.48%(4조1549억원) 줄었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1년 1월(1억8944억원) 이후 최저치다. 금리 인하로 회사채 발행시 이자 부담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요 부진을 우려한 기업들이 발행을 줄인 영향이다.
김상만 위원은 “불황에다 탄핵 정국,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불확실성이 커지며 리스크가 높은 국내 회사채 수요가 줄 수 있다. 2월부터 ‘옥석 가리기’ 수요로 회사채 시장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