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패싱' 트럼프 보니 '코리아 패싱' 떠오른다 [View]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이던 지난해 9월 27일(현지시간)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이던 지난해 9월 27일(현지시간)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테이블에 한국은 빠져 있는 장면이 연상됐다.”
미·러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정작 전쟁 당사국이 빠진 ‘우크라이나 패싱’ 논란을 두고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대북·대이란제재조정관은 19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대북 접근법은 미국과 한국의 충분한 조율을 통해서만 정답에 가까워지는데 ‘코리아 패싱’ 상황에서 이뤄진 미·북 협상은 잘못된 선택을 가져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우려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러 종전 협상에 자국이 배제된 상황에 대해 “우크라이나 없이 합의된 어떤 협상도 인정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강행 의지를 꺾지 않을 태세다. 오히려 젤렌스키 대통령을 겨냥해 “독재자” 등 자극적인 언사를 써가며 비난 강도를 확 끌어올렸다.

트럼프 “독재자 젤렌스키” 맹폭

지난 18일 전쟁 책임을 우크라이나 탓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FII) 프라이어리티 서밋’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그럭저럭 성공한 코미디언”이라고 지칭하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선거를 치르지 않은 독재자 젤렌스키는 서두르지 않으면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3월 20일 임기가 끝났지만 전쟁 중 계엄이란 특수 상황에서 대선을 연기했는데, ‘우크라이나 대선’을 주장해 온 러시아 편에 서는 듯한 뉘앙스였다. 종전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의 지원을 끊겠다는 위협이기도 했다.

젤렌스키 “트럼프 허위정보 공간에 살아”

그간 수위 조절을 해 온 젤렌스키 대통령도 묵과하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발언을 쏟아냈다. 이날 자국 TV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은 허위 정보의 공간에 살고 있다”고 직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자신을 두고 ‘지지율 4%에 불과한 대통령’이라고 공격한 데 대한 반격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퍼뜨린 허위 수치”라고도 했다.


이날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57%,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7%로 나타나 트럼프 대통령 주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안전보장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희토류 지분 50%를 요구한 데 대해서도 “나라를 팔 수는 없다”며 일축했다.

유럽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속도전과 우크라이나 책임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프랑스의 소피 프리마 정부 대변인은 “미국의 논리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고, 독일 아날레나 베어보크 외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두고 “어처구니 없다”고 했다. 다음주 초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인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밀착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우크라 패싱’ 한반도에도 시사점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그간 미국(조 바이든 행정부)과 유럽의 지원 속에 러시아에 맞서 3년간 항전해 왔다. 하지만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상황이 급변하자 우크라이나는 안전 보장을 위해 요구해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이 무산될 수 있다는 등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패싱’ 논란은 국제외교 무대에서 지정학적 약소국이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박탈당한 또 하나의 사례로 평가된다. 이는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도 직접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스마트 가이”라고 지칭하며 대북 정상외교 재개 의지를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집권 1기 때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취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집권 1기 때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취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다자외교 강화 등 미리 대비해야”

아인혼 전 조정관은 “김정은과 만남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밝힌 트럼프 대통령은 조만간 북한과의 관계 모색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아마도 이번에도 (정상 간)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이처럼 미·북이 직거래를 시도하면 정작 당사국인 한국이 논의 구조에서 빠지는 ‘코리아 패싱’이 현실화할 수 있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시사한 적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비핵화 대신 핵동결 등을 조건으로 ‘스몰딜’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도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시도할 경우 ‘서울 패싱’에 대한 불안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패싱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트럼프 행정부의 지상 과제인 대중국 견제를 위해서도 한·미 동맹, 한·미·일 안보 협력의 전략적 가치가 절대적으로 크다는 점을 계속 각인시켜야 한다. 아인혼 전 조정관은 “한국은 다자 협의체를 적극 활용하고 역내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등 다자주의 외교를 미리 강화해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