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신 달콤, 혁명 말고 혁신…캠퍼스 FM 구호가 달라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정기 연고전이 3년 만인 지난 2022년 열렸다. 연세대와 고려대 재학생들은 합동 응원전이나 뒤풀이에서 FM을 외치며 단합을 다진다.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정기 연고전이 3년 만인 지난 2022년 열렸다. 연세대와 고려대 재학생들은 합동 응원전이나 뒤풀이에서 FM을 외치며 단합을 다진다. 연합뉴스

 
“통일 연세! 선봉 문대! 이어 심리학과의 새 구호를 지어주세요”

25학번 신입생 환영 행사 준비에 분주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학생회는 ‘학과 이름표’를 선정하는 공모전을 지난달 열었다. 대학생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학교나 학과 이름 앞에 붙이는 별칭인 이른바 ‘FM(Field Manual)’ 문구를 새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때까지 심리학과는 ‘그중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이를 대체할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구호를 앞세운다는 계획이다.

김기범 연세대 심리학과 학생회 부회장은 “FM은 학과의 ‘한 줄 소개’와 같다”며 “다른 학과 만큼 특징적인 구호가 없으면 학교 행사에서 새내기들이 흥을 잃거나 학과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에선 학과 성격을 담은 “치유의 물결”, “정신적 지주” 등이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연세대 심리학과 학생회가 게시한 FM 공모전 공고. 인스타그램 캡처

연세대 심리학과 학생회가 게시한 FM 공모전 공고. 인스타그램 캡처

 
최근 대학가에서 학과 특성과 재치를 담은 FM 문구가 등장하고 있다. FM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각 대학 총학생회가 학교 이름 앞에 민족·구국·자주 등 구호를 붙여 부른 데서 유래했다. 투쟁 의지를 다지고, 다른 대학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단과대와 학과들마다 FM을 만들어 외치면서 점차 대학가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대 91학번 이준(54)씨는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FM이 대대로 이어졌다. 학교마다 독특한 신입생 환영 방식이 있었다”며 “이런 공통된 경험이 대학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도 유대감을 느끼는 바탕이 됐다”고 회상했다. 


1987년 5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현장. '민주 쟁취의 그날까지'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5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현장. '민주 쟁취의 그날까지'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중앙포토

 
시대가 바뀌면서 현재 대학생들은 FM에 정치적인 투쟁 구호보단 유머 코드를 담으려고 한다. 경희대 약과학과는 지난 14일까지 FM 공모전을 열고 ‘혁신약과’(73.6%, 중복투표)를 최종 선정했다. 후보 6개에 포함된 ‘달콤약과’(42.1%)와 ‘강약약과’(18.4%)가 시선을 끌었다. 각각 ‘학과명이 먹는 약과를 떠올리게 하니 귀엽게 부르자’,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유행어)을 연상시키는 언어유희’라는 취지다.

FM에 학과 정체성을 반영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고려대 인공지능학과 FM 공모전에는 ‘무한인지’, ‘전지전능 인공지능’ 같은 문구들이 제안됐다. 서강대 심리학과에선 도약·이해·토대 등 후보가 올라왔다. FM을 투표로 결정하면서 갈수록 줄어드는 학과·학생회 활동을 유도하는 효과도 있다.

심소민 경희대 약과대학 학생회장은 “반수와 편입이 많은 요즘 대학가에선 FM 같은 작은 상징도 소속감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연세대 김 부회장은 “자기소개를 어려워하는 대학생들이 많은데, 모두가 알고 있는 FM으로 운을 떼면 학생들이 다 같이 호응해 준다. 자신감을 얻게 해 대학생들의 교류를 활발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강압적인 술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현장에 쌓인 술병. 중앙포토

과거 강압적인 술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현장에 쌓인 술병. 중앙포토

 
한때 FM은 강압적 대학 문화의 상징이었다. FM을 변형하면서 음주와 단체 활동 참여를 강권했기 때문이다. 성적인 매력을 담아 자기소개를 하라는 ‘AM(Adult Manual)’이나, 귀엽게 자기소개를 하라는 ‘CM(Cute Manual)’, 장애인을 흉내 내며 FM을 하라는 일명 ‘JM’ 등이 문제가 됐다. 대학가에서 강압적인 술 문화, 군대식 문화를 퇴출하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확산하면서 FM을 포함한 대학 문화도 점차 변화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FM의 의미를 강화한 사례도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지난 2016년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거부와 총장 퇴진 운동 당시 ‘해방이화’ 구호를 내걸었다. 16학번 졸업생 이모(28)씨는 “재학생과 졸업생에게 자부심을 일깨우는 구호였다. 이 일체감 때문에 모두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최근에는 남녀공학 전환 문제로 학교 본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동덕여대 학생들이 ‘민주동덕’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