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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고속철도 개통 당시부터 투입된 KTX-1. 사진 코레일
KTX의 기대수명, 즉 안전하게 운행이 가능한 최대 연한은 통상 30년으로 잡는다. 이를 고려하면 남은 수명이 8~9년밖에 안 된다. 기대수명을 넘겨서 무리하게 운행하면 사고와 고장 위험이 커진다.
물론 기대수명이 되기 전에 정밀안전진단을 통과하면 5년을 더 쓸 수 있지만, 부품 조달 등이 여의치 않아 정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결국 승객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략 2033~2034년에는 새 열차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교체 대상인 KTX-1은 46편성 920량(1편성 20량)이다. 해당 열차를 운영하는 코레일은 이를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인 EMU-320이나 370으로 바꾸려고 한다. 시속 320㎞대의 EMU-320은 현재 운행 중인 KTX-청룡이 대표적이며, 더 빠른 EMU-370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KTX-1과 KTX-산천처럼 맨 앞의 기관차가 나머지 객차를 끌고 가는 ‘동력집중식’과 달리 ‘동력분산식’은 별도의 기관차 없이 객차 밑에 동력(모터)을 분산 배치한 것으로 가·감속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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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인 KTX-청룡. 최고 시속은 320km다. 연합뉴스
통상 고속열차를 도입할 때는 ‘발주·계약(약 6개월)→차량 제작(초도 편성 3년)→시운전(초도 편성 1년)→차량 인수(편성당 3주)’의 절차를 거친다. 46편성을 모두 순차적으로 인수하려면 2년 8개월가량이 소요된다는 게 코레일 측 설명이다.
이렇게 따지면 발주부터 차량 인수까지 적어도 6~7년이 걸린다. 해당 일정을 고려하면 늦어도 2년 뒤인 2027년에는 발주와 계약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다. ‘신규 철도차량의 효율적인 도입방안 제시’라는 연구용역을 수행 중인 이진우 KAIST 건설·환경공학과 교수에 따르면 2027년에 EMU-320 46편성(1편성 16량)을 한꺼번에 발주하는 경우 모두 5조원이 필요하다. EMU-370은 더 비싸 7조원으로 예상된다.
사업비의 원활한 조달 등을 고려해 2027년과 2032년에 각각 23편성씩 나눠서 발주하면 6조원 가까이 소요된다. 또 2차 발주 때 EMU-370으로 변경하면 금액은 다시 7조원에 육박한다.
이처럼 고속열차 교체에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보니 누가 사업비를 부담하느냐를 놓고 벌써부터 고민이 깊다. 원칙적으로는 해당 열차를 운영하는 코레일이 전액 부담하는 게 맞다. 자신들이 사용할 열차이니 교체비용 역시 직접 조달해야 한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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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디자이너
하지만 원칙만을 고수하기엔 코레일의 열악한 경영상황이 걸림돌이다. 코레일은 2023년에만 4700억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고, 부채도 20조원이 넘는다.
익명을 요구한 코레일 관계자는 “2012년 이후 13년간 철도요금이 동결된 데다 그사이 전기료 등 각종 비용은 크게 오른 게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코레일이 6조원에 달하는 고속열차 교체비용까지 모두 떠안게 되면 부채비율이 400% 안팎까지 치솟는다는 우려도 나온다. 채권 발행 등 빚을 얻어서 돈을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레일 입장에서 비빌 언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코레일이 서울시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있다. 49만5000㎡ 규모의 용산정비창 부지에 최고 100층 안팎의 랜드마크와 전시장·복합환승센터·오피스·아파트 등을 포함한 중심지를 조성하는 내용이다.

대전역에 있는 코레일(왼쪽)과 국가철도공단 사옥. 뉴스1
코레일이 해당 부지를 조성해서 매각하면 3조원 가까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전망도 있다. 하지만 경제 상황과 부동산 경기 등 유동적인 변수가 많아 낙관적 전망만을 할 수도 없다. 자칫 상당 기간 매각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철도업계와 전문가들은 일정 부분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철도가 공공재로서 국민의 이동 편의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고준호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새로운 열차가 도입되면 속도 향상 등 편리성이 높아지는 건 물론 안전도 강화될 것”이라며 “이런 면들을 고려하면 정부의 재정지원은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시교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모빌리티본부장도 “철도 산업 생태계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지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일정 수준의 요금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준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철도정책연구실장은 “정부 재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철도 요금을 높여서 추가로 재원을 확보하는 게 핵심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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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차량기지에서 KTX-1을 정비하는 모습. 사진 코레일
현재 도시철도에 대해서만 노후차량 교체 때 30%의 재정지원을 해주는 걸 고속열차 등 간선철도에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현행 규정상 신규 노선 투입용이 아닌 낡은 KTX 교체 때는 지원이 안 된다.
이호 한국교통연구원 철도교통연구본부장은 “안전성 측면에서 도시철도의 노후차량 교체 때 재정을 지원해주는 취지를 고려하면 이를 KTX 등 철도 전체로 확장하는 게 요구된다”고 말했다.
소관부처인 국토교통부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이다. 강욱 국토부 철도운영과장은 “코레일 자체부담, 정부 재정지원, 요금 인상 등 여러 방안과 분담 비율을 놓고 제대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낡은 KTX를 적절한 시기에 원활하게 교체하는 건 승객 안전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그러려면 코레일과 국토부, 기획재정부, 철도전문가들이 지금부터 머리를 맞대고 교체비용의 조달과 분담에 대한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