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다음은 환율전쟁? 美 ‘100년물 미국채 강매’까지 만지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의 다음으로 ‘환율 전쟁’을 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만성적 무역·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관세 완화를 빌미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요구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약달러’ 원하는 트럼프, “마러라고 합의 검토”

8일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조정하는 다자간 협의체인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러라고는 트럼프 대통령 소유의 리조트 이름이다. 과거 ‘브레튼 우즈 체제’나 ‘플라자 합의’가 협상 장소인 리조트명을 사용한 것을 본뜬 명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미국이 달러 가치 조정을 시도할 가능성이 큰 건 환율이 가진 상쇄 효과 때문이다. 실제 2019년 미·중 무역분쟁 당시 중국은 위안화를 절하해 미국이 부과한 관세 효과의 4분의 3 이상을 상쇄했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무역·재정적자)’가 기축통화인 달러의 구조적 강세 때문이라는 시각도 환율 전쟁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준비 자산으로 쌓아두면서, 달러 가치가 과도하게 올라갔고 이로 인해 미국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이 때문에 자국 제조업 부활을 내건 트럼프 정부로써는 달러 강세를 반드시 꺾을 필요가 있다.

관세 완화 빌미로 “약달러, 100년물 국채 강매 가능성”

미국 정부의 최근 관세 부과가 ‘약달러’를 만들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구체적 시나리오도 나온다. 스티븐 미란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 직후 만든 보고서인 ‘글로벌 무역시스템 재구성 사용자 가이드’에서 “징벌적 관세 이후, 유럽과 중국과 같은 무역 파트너가 관세 인하를 대가로 통화 협정에 더 수용적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관세를 먼저 부과한 후 이를 완화해주는 대가로 달러 약세에 동의하는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문제는 달러 약세를 인위적으로 만들 때 발생할 수 있는 후폭풍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려면, 그만큼 강한 수요(달러나 미국 국채 매수세)가 있어야 하고, 그럼 어느 정도 달러 가치는 유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러 강세가 지속하면 경상수지 적자는 누적된다. 결국 달러 기축통화 체제에서는 경상수지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가 발생한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미란은 해당 보고서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100년 물 미국 국채(century bonds)’를 동맹국에 사실상 ‘강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맹국에 미국 정부가 초장기로 공짜에 가깝게 돈을 빌려 장기간 달러에 대한 수요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약달러에도 달러의 기축통화로써 패권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게 미란의 생각이다. 미란은 “관세라는 채찍, 방위 우산이라는 당근을 활용하면 그런 거래에 동의하게 할 수 있다”고 보고서에 썼다.

플라자 합의 땐 ‘3저 호황’ “지금은 그때와 달라”

미국이 ‘약달러 체제’를 실제로 시도한다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복잡하다. 일단 약달러 자체는 한국 경제에 크게 나쁘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과거 플라자 합의 땐 수출 경쟁국인 일본 엔화의 가치가 크게 오르면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올라갔던 전례가 있다. 플라자 합의 이후 한국은 ‘3저 호황(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수혜를 입어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특히 이번 미국의 무역 분쟁의 주 당사자는 중국인데, 위안화 가치를 절상할 경우 중국과 경쟁하는 한국 수출품이 상대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

다만 플라자 합의 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엔화와 달리 위안화는 원화와 동조하기 때문에 위안화가 절상되면 원화도 따라서 올라 한국 수출품에 큰 이익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플라자 합의 때는 한국이 무역 적자국이었지만, 이번에는 흑자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흑자를 줄이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중국 안 따를 것, 트럼프 정책 실현 가능성 작아”

트럼프식 환율 전쟁의 실현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플라자 합의 때는 주 협상 대상인 일본과 독일이 미국 국방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협상 자체가 어렵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관세와 환율 정책을 크게 조정하는 상황에서 금융 불안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와 달리 대다수 국가가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강요로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 선거용 업적으로 내세울 투자 유치나 방위비 인상 같은 다른 반대급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