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잠든 국내 배터리 산업 지원 법안들이다. 전략산업인 2차전지 산업에 대한 생산 보조금 지원 근거를 마련하거나, 세액공제 혜택을 늘리는 등 그간 국내 배터리 업계에서 요구한 내용이 반영됐다. 정부 주도로 50조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 기금을 산업은행에 조성해 배터리를 비롯해 반도체·바이오·인공지능(AI) 등 미래 산업을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도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를 시작으로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정국이 이어지면서 논의는 올스톱됐다.
3중고 겪어도 나몰라라, 산업 주도권 뺏긴다
그 새 한국은 자국 정부의 대대적 지원을 등에 업은 CATL·비야디(BYD) 등 중국 배터리 업체들에 산업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국내 한 2차전지 업체 관계자는 “전기차 수요 둔화, 중국과의 경쟁, 대외 불확실성 등 ‘3중고’를 겪고 있어 정책 지원이 절실한데, 계류된 법안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정근영 디자이너
특히 올 1분기 경제 관련 상임위에서 열린 법안심사소위 개최 횟수는 17회에 불과했다. 21대 국회 같은 기간(41건)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국가첨단전략산업 지원 법안 등을 담당하는 산자위와 주거기본법 등 주택·부동산 법안을 담당하는 국토위는 각각 단 한 차례 열리는 데 그쳤다. 각종 조세특례법안이 계류된 기재위도 3회에 불과했다. 민생·산업 법안이 산적한 데도 정쟁 속에서 논의 테이블조차 제대로 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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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자 국민의힘 의원 등이 숙련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 기간 연장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에선 근로자 한 명 한 명이 맡는 역할이 큰 만큼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가 기간 만료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타격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주요 법안이 줄줄이 밀리는 가운데 기업들이 우려하는 법안들은 국회가 취사선택해 진행시키고 있다. 유력 주자인 이재명 후보가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 노조 파업에 대해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의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을 공약으로 앞세운 만큼 직접 대응은 자제하고 있다.
대응 어려운 기업들, 여야 협치로 도와야
10대 그룹 김모(56) 부사장은 “유력 후보가 공약하는 법안을 대놓고 반대할 순 없고, ‘찍히지 않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털어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국회가 경제 위기를 나몰라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국의 관세 폭탄 속에 기업들이 대응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데 국회까지 멈춰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기업의 ‘안테나’ 역할을 하는 대관 파트도 정중동(靜中動) 모드에 들어갔다. 대관의 주 업무가 국회, 정부부처와 소통인데 국회의원들은 선거 유세장에 가 있고, 새 정부 출범을 앞둔 마당이라 정부 부처 공무원들과도 정책을 협의하기가 어렵다. 이에 개별 기업 대신 경제단체들이 나서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제인협회·경영자총협회·무역협회·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5단체는 최근 이재명·김문수 후보와 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100대 과제’를 공동 제언하기도 했다.
최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생, 경제, 외교 통상 등 국익을 위한 분야에선 여야가 협치해야 한다”며 “여야 공조 없이 법을 통과시키거나 보류하면 현장은 적응하기도 힘들고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