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일 기업 간 약속 어기게 해”…여당 원내대표 만난 박용만의 호소

“정치가 기업으로 하여금 약속을 어기게 만드는 게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못 내리겠습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를 방문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한 말은 호소에 가까웠다. “최근 일본 관련 상황을 보면서 우리 기업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운을 뗀 박 회장은 최근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역사의 굴곡 속에서 생존해왔습니다. 내 나라말을 못 쓰던 시절에도, 내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부르지 못한 시절에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저희는 기업을 지켜왔습니다. 세계 시장에 우리 기업의 이름으로 제품을 내놓기 시작할 때는 이웃 기업과 협력하고 고객과 동반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의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의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배석자들의 시선이 박 회장에게로 쏠리는 사이 이야기는 ‘일본 기업’으로 이어졌다.

 
“제가 아는 일본 기업들 모두 고객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경제 교류는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약속이며 거래입니다. (약속과 거래는) 기업 모두가, 국적이 뭐든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약속과 거래를 한·일 기업들이 서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박 회장의 발언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기업인들의 지혜를 묻는 이 원내대표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한·일 양국 간 정치적 갈등의 불똥이 경제계에까지 튄 상황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풀이됐다. 그는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제발 정치가 경제를 좀 붙들어 줄 것은 붙들고, 놓아줄 것은 놓아 주어야 할 때 아니냐”고 적었었다.

이어진 비공개 간담회에서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굉장한 위기지만, 이번 기회에 소재·부품·장비 관련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대화가 오갔다고 정춘숙 원내대변인이 밝혔다. 박찬대 원내대변인은 “삼성, LG 등 반도체와 관련해 우리나라보다 더 큰 고객은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일본 기업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박 회장의 발언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가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을 방문해 김주영 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가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을 방문해 김주영 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앞서 이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을 찾아 김주영 위원장 등과 정책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에선 최저임금 등 노동 현안이 주요 의제로 올랐다. 김 위원장은 “최저임금 1만원 문제는 (지난 대선에서) 5당 후보가 공히 공약했던 문제인데 여전히 속도는 더디고 ‘을’ 간의 갈등으로 충돌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 원내대표는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노동의 입장에서 당연한 지적”이라며 “경청하고 할 수 있는 건 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다만,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서는 “지난번 교섭단체 대표연설 때 한 말이 내 입장”이라며 속도조절론에 변함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반대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 민주노총 페이스북]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반대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 민주노총 페이스북]

같은 시각 민주노총은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들어라! 노동개악에는 투쟁이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펼치고 규탄 집회를 열었다. 이 원내대표는 민주노총 집행부와도 만날 계획이나 아직 일정을 잡지 못했다.

‘경제계의 호소’와 노동계의 ‘요구’ 사이에 끼인 여당에서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 핵심관계자는 “여당은 노동계와 기업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도 ‘친(親)노동’ 원칙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 노조도 이기주의적인 태도는 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