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5일 내한한 영국 패션 브랜드 '올세인츠'의 피터 우드 CEO를 만났다. 오래된 재봉틀로 꾸민 매장 쇼윈도는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다. 최승식 기자
"패션은 경험을 통해 입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지난 15일 서울 삼성동 파르나스몰에서 만난 영국 패션 브랜드 '올세인츠'의 피터 우드 CEO의 말이다. 올세인츠는 1994년 영국 남성복 디자이너 스튜어트 트레버에 의해 설립된 컨템포러리 패션 브랜드다. 가죽 재킷, 남성 셔츠 등 캐주얼하면서도 멋스러운 옷들로 이름을 알린 뒤, 현재 세계 27개국에서 23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엔 2014년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소개됐다.
우드 CEO는 3~4개월에 한 번 꼴로 서울을 찾으며 국내 패션 시장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재무·회계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경제 전문가로 올세인츠에선 COO(총괄 운영 관리자)로 근무하다 지난해 말 브랜드 전체를 책임지는 CEO가 됐다.
현재 한국 패션 시장은 '생존이 곧 성공'이란 말이 나올 만큼 어렵다고 한다. 세계 시장 상황은 어떤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다. 사람들이 옷에 많은 돈을 쓰기 꺼리고 있다. 요즘엔 여행에 더 많은 지출을 하고 있는 분위기다. 옷을 사서 외모를 꾸미는 것보다 여행을 통한 경험 쌓기에 더 집중하는 추세다. 그 여파로 패션 경기가 많이 죽었다."
나쁜 시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세인츠는 성장 중이라고 들었다.
"지난 봄·여름 시즌 매출이 전 세계적으로 15% 이상 성장했다. 26개국 모든 나라, 모든 채널에서 골고루 좋은 성과를 올렸고, 올해 한국 성장률 역시 두 자릿수 이상이다."
"마케팅·유통 전략도 중요하지만, 패션 브랜드가 성장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본질은 바로 '좋은 옷'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거울을 봤을 때 나를 멋있어 보이게 만들어주는 옷보다, 입었을 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옷에 가치를 두는 시대다. 내가 입은 옷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됐고, 입었을 때 편안한지, 혹은 윤리적 만족감을 주는지 등 옷이 주는 '좋은 느낌'이 중요하다. 우리 옷을 입는 사람들이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지난 1년간 많은 노력을 했다."
"과거 우리 핵심 제품은 가죽 재킷이었다. 하지만 가죽 재킷 하나로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고, 지난 1년간 여성 원피스 개발에 집중했다. 또 다른 영국 브랜드 '테드 베이커'에서 디자이너를 영입해 드레스 스타일 수를 파격적으로 늘렸다. 결과적으로 올해 봄·여름 시즌 여성 드레스 매출이 지난해 대비 50% 이상 늘었고, 여성복 매출 규모가 남성복과 같은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번엔 남성복에 집중하고 있다. 셔츠와 재킷으로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프로덕트'가 대표적이다. 남성 셔츠는 원래 인기 있는 제품군인데, 가죽 재킷 대신 아우터 역할도 동시에 할 수 있는 옷으로 실용성을 부각했다. 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발과 가방에도 투자하고 있다. 전제 매출에서 보면 아직 비중은 작지만 신발은 매년 40% 이상, 가방은 여성복 매출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파이낸스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 제품을 강조하는 것 같다.
"재무·회계 분야에서 오래 일하면서 정말 많은 사업계획서를 봤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가장 좋은 사업 계획은 '상품'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성공하는 회사가 가져야 할 무기는 상품-마케팅-리더십 순이고, 마지막이 숫자다."
"우리가 온라인에 집중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전체 매출 중 온라인 판매가 20% 정도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그렇다고 오프라인 매장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계 패션업계는 오프라인 매장을 줄이고 온라인으로 모든 유통을 전환하는 분위기다. 올세인츠의 전략은 다르다는 건가.
"이제 온·오프라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얘기다. 소비자들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동원해 자신이 가장 편한 방법으로 옷을 산다. 예컨대 점심시간에 매장 옆을 지나가다 예쁜 재킷을 봤지만 시간이 부족해 매장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분명히 온라인몰에서 그 제품을 검색해 볼 거다. 온라인에서 가격이나 디자인 등이 마음에 들었다면, 퇴근 후 다시 매장에 들러 옷을 직접 입어보고 바로 사거나 온라인으로 주문할 것이다. 이런 시대엔 '어떻게 하면 고객이 쉽게 상품을 살 수 있게 할까'만을 생각해야 한다."
"좋은 브랜드가 많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한국 브랜드는 6살짜리 딸이 빠져있는 BTS가 아닐까 싶다. 내가 6살 때는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다. 지금 영국에선 어린이들이 K-POP을 흥얼거릴 정도로 한국 문화가 잘 알려져 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