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경기도 의왕시 본사에 설치된 가방을 형상화한 작품 앞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보라색 바지를 입은 남자들
그 후 뉴욕·밀라노·파리 등에서 ‘5만 원짜리 핸드백이 아니라 300만 원짜리 명품백이란 게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란 그는 결국 1987년 서울 영등포에 ‘시몬느’를 창업하고 직접 명품 핸드백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치·마이클코어스 핸드백, 한국이 만든다
회사 설립 34년. 더러 침대회사 이름과 헷갈리기도 하지만 시몬느는 세계 1위 명품 핸드백 제조회사가 됐다. DKNY·코치·마이클코어스·마크제이콥스를 비롯해 폴로랄프로렌, 토리버치 등 20여개 명품 브랜드가 고객사다. 무엇보다 고객사의 요구대로 생산하는 게 아니라, 제품 기획부터 개발·제작까지 직접 참여하는 제조업자 개발생산(ODM) 방식이다. 지난 40여년간 만든 핸드백 견본(스타일)만 22만개다. 그 결과 세계 명품백 ODM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약 10%, 북미 점유율은 30%에 육박한다.

숫자로 보는 시몬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시몬느 덕에 다리 뻗고 잡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는 2019년 매출 1조원을 넘겼다. 글로벌 브랜드들과 동등한 협업관계를 이룬 덕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 5년 평균 영업이익률은 16.3%로, 패션제조업 평균치(4%대)의 3~4배 수준이다.
여성에게 핸드백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과 일본, 홍콩은 유독 에르메스·샤넬·루이비통 같은 최고급 명품을 선호해요. 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명품을 경험해 본 유럽이나 실용적인 문화가 강한 미국에선 오히려 합리적 가격대의 브랜드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요.”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러시아·브라질 등 제3세계 국가에서 시몬느의 주요 고객사인 소위 ‘어포더블 명품(affordable luxury)’의 성장률이 매우 높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명품 핸드백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계층을 구분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같은 존재도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현동 기자
“남자고 여자고 힘들고 고생했을 때 함께 했던 물건은 쉽게 못 버리잖아요. 늘 옆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핸드백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담는 분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명품백에 남다른 의미를 주는 것 아닐까요.”
한글사랑으로 이어진 세계1위 자부심
“옛날의 좋았던 경험만 강조하면 아집이 될 수 있어요.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채우고, 계승·발전시킬 유산만 추려내 미래로 가자는 뜻이죠.”
이를 위해 매년 사내 50·60대 장인들과 젊은 캐드(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디자이너, 산업공학 및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지털에 취약한 장인들과 소재 및 제조를 배우려는 젊은 세대를 연결해 서로 역량을 전수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 핸드백 용어사전 』을 펼쳐보이고 있다. 임현동 기자
도쿄는 지는 해, 서울은 빛나는 해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삼성 등 글로벌 기업의 파워, 월드컵 등 국제 행사로 알려진 5000년 문화, 김연아 선수 등이 증명한 예술성, 전 세계 패션업계마다 포진한 한국인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패션 강국’의 토양이 무르익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한국이 이제 세계적으로도 패션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현동 기자
“나에게 핸드백이란…”
“어떻게 보면 작은 산업이죠. 그래도 그 작은 캔버스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칠하고 싶은 색을 마음껏 펼치게 해 준 게 핸드백이에요. 무엇보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세상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줬으니 고마워요. 제가 꽃봉오리를 맺는 것까지 하고 나면 그 다음 후배 세대는 꽃이 만개하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