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전자공학에 대한 지식이 많았지만 문학, 철학,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오른쪽은 지난달 14일 국제기능올림픽 대회 출전 선수를 만난 윤석열 대통령. 윤 대통령은 이날 코딩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IT기업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감히 토를 달자면 코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윤 대통령이 코딩에 소질이 없어서다. 코딩 공부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흥미를 느끼긴 어렵다는 고백에 모두 공감할 거다. 코딩교육이 온라인 시스템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개발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IT기업에선 일할 수 없는 걸까? 아니다. IT기업이 각광받으면서 너도나도 코딩에만 목을 매지만 코딩을 몰라도 얼마든지 IT기업에서 핵심적 업무를 할 수 있다. 직접 ‘만들기’보다 ‘무엇을 왜' 만드느냐에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바로 내가 하는 이 기획자(PO·프로덕트 오너)라는 직업이 그렇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개발자에 올라온 코딩 교육 광고. 학원에서 교육만 받으면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돼 있다. SNS 캡처
아마 가장 유명한 기획자는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일 거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역사상 이 일을 가장 그럴듯하게 잘해서 각광받았다.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아니었지만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내놓은 기술과 디자인을 활용해 뛰어난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어내기까지 기가 막히게 지휘를 잘했다. 모든 기업 대표가 잡스처럼 그렇게 실무까지 뛰어날 수는 없기에 많은 기업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함께 할 서비스기획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코딩 열풍이 살짝 아쉽다. 국내의 수많은 코딩교육 과정을 보면 ‘기획’의 존재는 없다시피 하다. 이러니 초보 개발자일수록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와 달리 영국의 코딩 교육은 컴퓨터 언어 학습 자체보다 이 언어로 무얼 만들 것인가, 즉 기획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고 한다. 코딩 기술을 활용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코딩 교육의 본질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정반대다. 코딩 교육도 문제지만 여기 뛰어드는 수많은 문과생 역시 IT기업에 가야 한다며 맹목적으로 ‘파이썬’(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부터 수강한다. 이 과정에서 ‘개발자를 못하면 기획자나 되자’고 한다. 잘못된 접근이다. 서비스 기획자는 개발자와는 다른 영역의 전문성이 있다. 비즈니스 이해도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불편하지 않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이를 개발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하면서 수많은 관계자와 제대로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런 산출물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커뮤니케이션과 방향성, 우선순위 판단 등 기획자 개인의 역량 차가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파이썬 언어로 된 프로그램. 이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게 통상적 코딩 교육 입문 과정이다. 영화를 보면 기획자가 개발자와 함께 이런 화면을 놓고 얘기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SNS 캡처
결국 인문학도는 IT기업 안에서 동등한 출발 선상에서 있지는 않은 셈이다. IT기업에서 제대로 역할을 해내기 위한 지식을 쌓아가려면 고통스러운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말하면 도돌이표처럼 "거봐라, 코딩 배워야 하잖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과거에 배운 게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만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사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인문대생 출신이었기에 IT 분야 서비스기획자로서 남다른 장점을 가질 수 있었다.
2011년 졸업 때 이미 사학과는 역사 사(史)가 아니라 죽을 사(死)라 불릴 만큼 취업 시장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원래 사학과로 입학한 뒤 굳이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것 역시 취업하려면 그런 스펙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무수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롯데 공채로 입사하는 데에 경영학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일하는 과정에서는 경영학은 무쓸모, 오히려 사학에서 배운 ‘생각하는 방식’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사학은 역사를 배우는 학문이지만, 중·고교 시험 때 그랬던 것처럼 역사 연표를 줄줄 외우는 게 다가 아니다. 사학과 리포트나 시험은 백지 위에 특정 사건에 대한 원인과 의의를 쓴다. 외워서 단순히 풀어내는 게 아니라 사료를 근거로 자기 생각을 쓴다. 고교 때까지 단순 암기과목이라고 생각했던 사학은 실제 접해보니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었다. 외어야 하는 게 있다면 단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맥락’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력과 맥락 파악은 서비스기획자로서 매우 큰 무기가 되었다.

크게 늘지 않은 기업의 개발자 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