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칩 뒤로 한국과 일본의 국기가 맞닿아 있다. 일본이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와의 정면승부도 점점 불가피해지고 있다. 셔터스톡
베일에 싸여 있던 ‘일본 반도체 부활의 희망’ 라피더스가 사업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다만 당초 비전과는 달리 몸을 다소 낮추는 모양새다. 라피더스는 TSMC와 삼성전자·인텔 등을 겨냥해 지난해 8월 토요타·소니·키옥시아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출자해 설립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다.
“2028년부터 최첨단 칩 시제품 생산”

김영희 디자이너
라피더스는 앞서 2027년 세계 최고 수준인 2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의 반도체 생산을 첫 목표로 제시한 바 있다. 에노모토 전무의 이번 발언은 애초 공개한 계획보다는 다소 늦은 시점이다.
에노모토 전무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라피더스는 TSMC나 삼성과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라며 “일부 고객사를 위한 맞춤형 칩 생산 모델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정면 승부에 나설 것이라는 업계의 전망에는 선을 그은 것이다.
TSMC나 삼성전자처럼 대규모 물량을 수주하는 방식으로 시장 점유율을 키우기보다는 인공지능(AI)·데이터센터·차량용 반도체 등 특정 영역 수요를 겨냥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파운드리 틈새시장에 안착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당장 토요타·소니·NTT 등 라피더스에 출자한 기업의 자체 반도체 수요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첨단 칩 생산을 시작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캐논도 ASML에 맞설 노광장비 개발 중
여기에 라피더스마저 첨단 칩 양산에 성공하면 메모리 반도체의 키옥시아·마이크론에 이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도 제조기지를 갖추며 일본만의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게 된다. 라피더스가 일본 반도체 부활의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꼽히는 이유다.

지난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인 ‘세미콘 재팬’에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석한 모습. 사진 세미콘 재팬 2022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재건을 목표로 라피더스에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다. 이미 미국 IBM, 벨기에 종합반도체연구소 IMEC과 손잡고 본격적인 첨단 칩 기술 연구에 돌입했다. 올해 미국 현지에 파견한 기술 인력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또한 2나노 칩 시험 생산라인 ‘IIM-1’ 가동을 준비하기 위해 홋카이도 치토세에 공장 부지를 확정하고 건설에 들어갔다.
도쿄 등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곳에 생산 기지를 세운 배경에 대해 에노모토 전무는 “산업용수와 전력은 물론 항공 등 교통 연계성을 고려한 것”이라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젊은 반도체 개발 인력을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라피더스의 최첨단 칩 시험 생산라인 ‘IIM-1’ 부지. 차량으로 5분 거리에 홋카이도의 관문 신치토세 공항이 인접해있다. 이희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