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최대한 표현 아낀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 보여주고 싶어서"

이강소,'무제-91193', 1991, 캔버스에 유채, 218.2x291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무제-91193', 1991, 캔버스에 유채, 218.2x291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개인전 전시장 전경.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개인전 전시장 전경. [뉴시스]

50여 년 전 어느 날. 청년 미술가 이강소는 선술집을 찾았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낡고 닳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선배와 마주 앉아 있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각자 자기 모습은 직접 볼 수 없구나. 사람들은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어도 이 순간을 모두 다르게 보고, 다르게 기억하겠구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에 왔던 사람들이 지금 없듯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중엔 없겠구나···'. 

이후 그곳에 있던 낡은 탁자와 의자는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 퍼포먼스 작품으로 놓였다. 제목은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 당시 화랑을 찾은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행위가 작품이 됐다. 그 모습은 몇 컷의 사진으로 남아 지금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벽에 걸렸다. 또 미술관 로비(서울박스)엔 당시 선술집처럼 메뉴 간판과 탁자, 의자들이 놓였다. 현재 그곳에서 막걸리를 마실 순 없지만, 관람객은 그곳에서 잠시 쉬다가 자리를 뜬다. 50년의 세월을 지나 새롭게 이어진 '소멸'의 풍경이다.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멸'의 퍼포먼스 현장 , [국립현대미술관]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멸'의 퍼포먼스 현장 ,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 재현된 '선술집' 풍경. 위로 이강소 화백의 그림이 보인다.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 재현된 '선술집' 풍경. 위로 이강소 화백의 그림이 보인다. [뉴시스]

 

이강소, '생셩-06-C-008'. 2006, 테라코나 50x39x2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생셩-06-C-008'. 2006, 테라코나 50x39x2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현대 미술가 이강소(81)의 개인전 '이강소: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일 개막했다. 전시 제목이 '바람이 물을 스칠 때'란 뜻의 '풍래수면시'다. 송나라 문인 소옹(邵雍,1011~1077)의 시 '청야음'(清夜吟)에서 따왔다. 새로운 세계와 마주쳐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있음과 없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함축해 보여준다.  

이강소는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 미술을 이끌어온 주역이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신체제 창립전'(1970), '71 AG전:현실과 실험'(1971) 등 현대미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실험 미술 전시에 참여했다. 약 100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평생 천착한 질문과 실험의 요체를 드러내는 주제전에 가깝다.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 등 매체는 다르지만, 그의 작품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존재하는 나와 세계의 존재, 그리고 지각(知覺)에 대한 끈질긴 의심, 즉 회의(懷疑)다. 특히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은 작가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졌다.


70년대부터 '작가 지우기' 작업 

이강소, '페인팅 78-1', 1978,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29분 45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페인팅 78-1', 1978,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29분 45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깨진 돌과 깨어지기 전의 돌이 담긴 사진, 판화, 드로잉, 회화를 한자리에 모았다. 초기 설치 작업부터 현실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뉴시스]

깨진 돌과 깨어지기 전의 돌이 담긴 사진, 판화, 드로잉, 회화를 한자리에 모았다. 초기 설치 작업부터 현실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뉴시스]

이를테면 1970년대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은 작품에서 작가를 최대한 지우는 작업이었다. 카메라 앞에 유리를 세워 놓고 유리를 붓으로 칠하는 장면을 반대편에서 촬영한 것으로, 작품이 완성될수록 화면 속에서 작가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담았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페인팅 78-1'은 작가가 작품에서 자신의 존재를 비워내는 행위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며 "작가 참여를 최소화하고 관객 각자가 작품을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태도는 이후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진다"고 말했다.  

작가가 '만들어지는 조각'이라고 칭하는 조형 작품도 '작가 지우기'의 연장선에 있다. 그의 조각은 깎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테라코타 등의 재료를 던지는 행위를 통해 완성한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재료의 중력과 작업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무게를 뒀다. 

작가가 뒤로 물러서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회화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1980년대 초 추상적 드로잉에서 시작해 1980년대 후반부터 집, 배, 오리, 사슴 등이 등장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어 1990년대 이후엔 힘 있는 붓의 움직임을 강조하며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회화 중 하나가 세로 2m, 가로 3m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에 거친 붓선으로 사슴을 그린 '무제-911193'다. 여러 각도에서 본 사슴의 모습이 중첩된 것처럼 표현돼 있다. 이에 대해 이 학예연구사는 "'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작가 자신의 철학을 회화적 실험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강소, '섬에서-03037', 2003, 캔버스에 유채, 200x360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섬에서-03037', 2003, 캔버스에 유채, 200x360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강소 '꿩'(1972/2018), 박제 꿩, 물감. 정물화용 박제 꿩을 설치하고 그 뒤로 꿩의 발자국을 찍었다. 있음과 없음을 화두로 한 작가의 작업 중 하나다. 흔적을 통해 꿩이 과거에 살았었음을 나타낸다. [뉴시스]

이강소 '꿩'(1972/2018), 박제 꿩, 물감. 정물화용 박제 꿩을 설치하고 그 뒤로 꿩의 발자국을 찍었다. 있음과 없음을 화두로 한 작가의 작업 중 하나다. 흔적을 통해 꿩이 과거에 살았었음을 나타낸다. [뉴시스]

 
한편 이강소는 '오리 작가'로 불릴 만큼 그의 작품엔 오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캔버스에 드러내 보인 것은 오리 그 자체이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자 에너지, 즉 기(氣)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생명체의 상징에 가깝다. 그의 회화가 갈수록 형상 그 자체보다는 강렬한 붓놀림 만으로 완성하는 작업으로 나아간 것도 그런 연유로 읽힌다. 작가가 자신을 지우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최대한 비운 자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완전히 표현을 안 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표현을 아낀다"며 "그럴수록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을 떠올리고 상상을 하며 작품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선술집에서 그가 깨달은 것처럼 "우리 세계가 각기 다른 경험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인식한 세상 속에서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미술은 그렇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조여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한편 국내외 미술계에서 그의 이번 전시는 개막 전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국내에선 꾸준히 지속해온 작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오며 국제무대로 뻗어 나가야 할 '한국 대표 거장'으로 늘 손꼽혀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9월 오스트리아 기반의 글로벌 갤러리인 타데우스로팍의 전속 작가가 되면서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이 더 쏠리고 있다.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소속된 이 갤러리를 통해 앞으로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커질지 기대를 모은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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