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과 동년배였고 약 1년 더 오래 생존했던 시인 왕유가 스님 신분인 것은 아니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만년에 불교에 심취했다. 그런 인연으로 시불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칭호를 얻었다.
이번 사자성어는 시중유화(詩中有畵. 시 시, 가운데 중, 있을 유, 그림 화)다. 앞의 두 글자 ‘시중’은 ‘시 가운데’라는 뜻이다. ‘유화’는 ‘그림이 있다’라는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시 안에 그림이 있다. 즉, 시를 감상할 때 그림이 함께 연상된다’란 의미가 성립한다.
‘왕유의 시 속엔 그림이 있다. 그의 그림 속엔 시가 있다.’ ‘시중유화’는 문장가 소동파가 자연과의 미묘한 교감을 담은 왕유의 시를 평가한 이 문장에서 4글자만 취한 것이다.
왕유는 지방 관료를 지낸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의 영향으로 그의 자(字)도 유마경(維摩經)이 연상되는 마힐(摩詰)로 지어졌다. 불교에서 유마힐(維摩詰) 거사는 부처 생존 당시의 한 재가신자(在家信者)다. 불교의 진수를 체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총명하고 조숙했던 왕유는 15세 무렵에 일찌감치 수도 장안에서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30세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중앙 정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진에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시, 서예, 그림에 능했고, 음악과 무용에 조예가 깊었다. 불행하게도 한창 활동하던 시기인 50대 중반에 ‘안녹산의 난’이 발생한다. 관료 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던 그의 삶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세월이 흘러 수도가 수복되고 그는 고위 관료로 다시 임용됐다. 만년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던 왕유는 병을 얻어 61세로 생을 마쳤다.
시인 왕유의 삶에 한 여인이 큰 영향을 끼쳤다. 모친 최(崔)씨는 일관된 생활 철학을 갖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철저히 실천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평생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다. 늘 선(禪)을 수행했다.
과거에 장원 급제한 후, 왕유가 하루는 모친에게 새 옷을 한 벌 선물했다. 모친이 사양하며 말한다. “난, 새 옷 필요 없다. 여래의 집에 살고 이미 인욕(忍辱)의 옷을 걸치고 있는데, 새삼 내게 무슨 옷이 필요하겠니?”
그래도 왕유가 다시 권했다. 아들이 입신출세하여 기념으로 지어드리는 옷이라며 나름 설득을 시도해 본다. “나를 욕망의 세계로 이끌려 하지 말거라.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은 욕망을 낳을 뿐이다. 나는 이미 미추의 세계를 벗어났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으로도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단다.” 모친은 이렇게 거절한다.
왕유는 맹호연(孟浩然)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둘은 ‘왕맹(王孟)’으로 칭해지며, 뛰어난 자연시 작품들을 남겼다.
‘가다가 산길마저 끝나는 물가에 이르면(行到水窮處), 바위에 앉아 구름 생겨나는 것을 감상한다(坐看雲起時). 우연히 산에 사는 노인이라도 만나게 되면(偶然値林叟), 담소하느라 귀가할 때를 잊곤 한다(談笑無還期).’ 왕유가 만년에 지은 이 ‘종남별업(終南別業)’ 제2연에 ‘시중유화’ 특징이 특히 잘 드러난다.
대나무 숲속 은거를 노래한 작품 ‘죽리관(竹里館)’도 꽤 유명하다. ‘홀로 깊은 대 숲 안에 앉아 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도 불어본다. 아무도 모르는 이 깊은 숲을 명월(明月)이 방문해 비추어 준다’. 대나무 사이에 앉아, 음악과 침묵을 밝은 달과 공유하는 왕유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음에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왕유 모친의 단아한 자태를 한 폭 동양화로 떠올려보자. 대자연을 가까이하려, 만년에 산에서 궁궐까지 출퇴근을 선택한 고관 왕유의 그 심플한 삶도 함께 스쳐 간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Walden)’마저 왕유 모자(母子)의 이 절제하는 경지 앞에서는 색이 바랠지 모른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