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업의 연구개발(R&D) 인력에 주 52시간제 적용을 예외로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의 연내 처리가 사실상 물 건너갔다. 26일 여야가 한 달여 만에 다시 소관 상임위원회 소위를 열어 막판 협상을 시도했지만 논의가 또다시 미뤄지면서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보조금을 주며 생산기지를 유치하는 가운데, 한국 국회가 수만 개의 일자리가 달린 법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날 오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를 열고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려 했지만 다른 법안 심사가 길어지면서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산회했다. 같은 날 오후 한 차례 더 소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국민의힘 비상의원총회 일정 등으로 속개되지 않았다. 이날 소위는 지난달 21일 이후 한 달여 만에 어렵게 열린 것이라 산업계의 기대가 컸다. 지난달 첫 소위에서 여야는 주 52시간제 등 쟁점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 했고, 당초 이달 9일 다시 소위를 열어 합의하려 했지만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에 파묻혔다.
여야 간사가 협의를 거쳐 소위를 다시 열더라도 연내 법안 처리는 사실상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산자위 야당 간사인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통화에서 “소위 일정을 다시 잡을 것”이라면서도 “주 52시간제가 합의된다는 전제하에서 상임위 전체회의와 법사위 통과 등이 진행돼야 하는데, 쟁점에 대한 여야 합의가 안 된다면 연내 처리는 물리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당초 여야가 이견을 보인 직접 보조금 지원 안의 경우 ‘보조금’이라는 문구 대신 재정 지원 정도를 반영하는 선에서 여야가 합의했다. 그러나 여당이 지난달 기존 법안을 통합한 안으로 발의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R&D 직무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부분은 여야 입장 차가 여전하다.
야당은 선택근로제·탄력근무제·특별연장근로제 등 기존 제도로도 필요시 주 52시간 이상의 근무가 가능하고, 논의하더라도 주 52시간제를 규정한 근로기준법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자위 소속의 한 야당 의원은 “반도체법에서 핵심은 전력·용수 공급 등의 인프라 비용을 기업이 아닌 정부와 지자체가 부담한다는 내용”이라며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에 발이 묶인 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미·일 연장 근로시간 어떻게 다른가 그래픽 이미지.
그러나 여당 측은 근로기준법으로 넘기면 개정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고 보고,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기업들도 R&D 인력이 여느 제조업 생산직과 마찬가지로 주 52시간제를 적용받으니 글로벌 기술 경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엔비디아나 대만 TSMC 등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차세대 기술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엔비디아는 실리콘밸리의 ‘압력솥(pressure cooker)’으로 불릴 만큼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직원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보상을 두둑하게 받는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화이트 이그젬션(고액 연봉자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 예외)을 주장하는 이유다. 최근 안현 SK하이닉스 사장은 한국공학한림원 행사에서 “연구개발에 관성이 붙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가 부정적 습관이나 관행을 만들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전 반도체특별법 제정에 기대를 걸었던 업계는 연내 처리 무산 가능성이 커지며 실망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주요국 기업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경쟁하는데 우리 기업만 뒷다리를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는커녕 메모리 반도체도 1위를 지키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