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번에는 대통령 취임 전부터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오히려 덴마크가 응하지 않으면 그린란드가 독립하도록 부추기겠다는, 과격한 언사까지도 하고 있다. 고도의 정치 행위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여전히 그린란드 매입을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린란드가 지리적으로는 북미에 위치해도 캐나다에 인접한 데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는 유럽에 속해 있기에 미국과의 접점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가 1867년 그린란드 구매를 주장했을 정도로 생각보다 미국의 관심은 오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군사적으로 점령한 적도 있었다. 단지 점령에 그치지 않고 독일군과 교전을 치르기도 했다.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이는 현대적인 군대가 공식적으로 지구의 가장 북쪽에서 벌인 지상전이었다. 다음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그린란드는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나라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독일의 속국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열강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그린란드에 관심을 보였다. 먼저 영국이 캐나다와 연결하는 북대서양 항로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눈독을 들였다. 사전 단계로 5월 10일 그린란드와 접한 아이슬란드를 침공해 무혈점령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이 영국에게 그린란드 점령은 미주 대륙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비록 지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어도, 미국은 여전히 유럽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중립 기조를 유지했다. 미주 대륙의 주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만일 영국이 그린란드를 침공한다면 심각한 위기라고 본 것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그린란드를 앞마당으로 여겼다.
독일도 관심이 많았다. 당장 이곳을 점령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꼭두각시로 전락한 덴마크 정부를 통해 어떻게든 계속 통제하려 했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단순히 영토 확장이나 해상로 확보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유럽 정복 후 히틀러의 다음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다. 그런데 소련과 전쟁을 벌이려고 그린란드를 군사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때 그린란드는 독자 행보에 나섰다. 본국이 독일에 항복하자 남그린란드 행정관인 에스케 브런은 북그린란드 행정관인 악셀 스베인과 긴급히 만나 당시 상황을 1925년 제정된 법률에 따라 비상사태로 규정했다. 이때 이들과 함께 회동한 헨리크 카우프만 주미 덴마크 대사는 4월 13일 미국의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린란드를 자치 지역으로 선포하고 브런이 정부를 이끌도록 조치했다.
이런 조치와 미국의 개입 덕분에 그린란드는 전쟁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피했으나, 어려움은 여전했다. 당장 자치 정부는 오래전부터 영유권을 주장하던 노르웨이가 신경 쓰였다. 독일에게 패해 망명한 자유 노르웨이군이 그해 11월 캐나다에 기지를 설치했다. 이들이 영국과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그린란드 침공에 나설 것이라는 소식이 공공연히 흘러나와 신경을 곤두서게 한 것이었다.
여전히 중립국인 미국이 영국을 견제하고 자치 정부를 후원했으나, 현실적으로 1개 소대 규모의 순찰대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1941년 4월 9일, 그린란드의 주권을 지키려고 카우프만은 마치 이이제이(以夷制夷)처럼 미국과 협정을 맺어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차선책을 택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이 전격적으로 참전을 선언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그린란드 곳곳에 대규모의 군사 시설이 속속 설치됐고, 2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원주민의 배가 넘는 미군이 주둔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셈이었다. 이 정도까지 원한 것이 아니었던 자치 정부의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거기에다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교전 행위까지도 벌어졌다. 엉뚱하게도 그린란드에서 4000㎞ 떨어진 소련 모스크바 일대에서 1941년 겨울에 벌어진 전투 때문이었다.
소련을 침공하기 전 독일 기상대는 그해 겨울이 따듯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러시아 평원에 40년 만의 혹한이 몰아닥치면서 제대로 된 동계전투 장비를 보유하지 못한 독일군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결국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했고 독일의 팽창은 멈췄다. 이에 독일은 1942년 전쟁을 대비해 날씨에 관한 정확한 예보 자료를 얻고자 북극 가까운 곳에 관측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1942년 8월, 독일군은 연합군의 감시망을 피해 그린란드 동해안 네 곳에 기상대원과 장비를 은밀히 상륙시켰다. 사실 연합군이 그린란드에 배치돼 있었고 주변 해역도 감시 중이었지만, 워낙 큰 섬이다 보니 독일군의 침투와 배치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은밀히 적진 한가운데서 관측 활동을 벌인 독일군은 획득한 기상 정보를 암호화한 무선 체계로 본국에 통보했다.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혹한에 노출된 악조건이었지만, 6개월 동안 임무를 수행한 이들의 노고 덕분에 독일은 1942년 동계전투에서는 악몽을 재현하지 않았다. 반면 연합군은 이들이 철수하고 난 직후인 1943년 봄에서야 독일군의 흔적을 발견했다. 톡톡히 재미를 본 독일군은 그해 여름 2차 파견대를 보냈고, 이들도 6개월간 활동 후 무사히 철수했다. 미군은 또다시 뒤늦게 헛물을 켰다.
절치부심한 미군은 1944년 3월에 독일 3차 파견대를 발견했다. 클라베링 섬에 전개한 독일군을 격퇴했고, 사빈 섬에 설치된 관측소는 폭격기로 공격했다. 이후 10월 말까지 거대한 그린란드 곳곳에서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독일군 6명이 전사·상했고, 상당수가 생포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북쪽에서 벌어졌던 전투라는 의의가 있었지만, 사실 전투 자체가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1945년 5월 4일, 덴마크 주둔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그린란드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났다. 그런데 곧바로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곧바로 냉전이 시작하며 덴마크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자 오히려 군사적 가치가 커졌다. 현재도 피투피크 미 우주군 기지처럼 일부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유다. 이런 역사와 전략적 위상으로 말미암아 설령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