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35년 전엔 '휴전선 방벽' 철거 주장...합의서엔 국호 표기도 거부

1989년 11월 15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제4차 예비회담에서 회담 참석 남북 대표단이 서로 악수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 연합뉴스

1989년 11월 15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제4차 예비회담에서 회담 참석 남북 대표단이 서로 악수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 연합뉴스

북한이 35년 전 우리 군이 구축한 대전차 방어용 방벽을 영구 분열을 위한 차단물이라고 비난했던 사실이 1990년 고위급회담 예비회담 회의록을 통해 재확인됐다. 북한이 지난해부터 남북연결 후도로·철도를 폭파하고, 물리적인 장벽을 설치한 것과 배치되는 모습이다.

13일 통일부가 공개한 1984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의 정치·경제·체육 분야 남북 회담 문서(2266쪽 분량)에 따르면 북한은 1990년 1월 31일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고위급회담 6차 예비회담에서 돌연 '콘크리트 장벽'을 언급하면서 비난을 시작했다.

北, 콘크리트 장벽은 "민족 분열·대결의 상징"

북측 단장인 백남준 정무원 참사는 이날 기본발언에서 "나라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콘크리트 장벽은 민족분열과 북남대결의 상징이며 세계 어느 나라 국경에서 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인공적 차단물"이라며 "콘크리트 장벽을 제거하고 북과 남은 자유래왕(왕래)과 전면개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백남준이란 가명으로 회담장에 나왔던 백남순은 1998년 9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외무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990년 1월 31일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제6차 예비회담 개최 모습. 사진 통일부, 연합뉴스

1990년 1월 31일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제6차 예비회담 개최 모습. 사진 통일부, 연합뉴스

이에 남측 수석대표인 송한호 통일원 차관은 "이와 같은 군사용 시설을 갖게 된 건 6·25때 귀측(북한)이 수백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서 기습남침을 해 우리 군이 부득이 후퇴한 교훈을 경험 삼아 만든 것"이라며 안보를 공고히 확보하기 위한 방어용 시설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하지만 북측 대표로 나온 김영철 당시 인민무력부 부국장(노동당 10국 고문)은 "6·25가 무슨 북의 탱크의 기습남침이요"라며 "이 발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며 회담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북측은 이를 빌미로 대화를 거부했고, 결국 회담은 북한이 콘크리트장벽 철거와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등을 주장함에 따라 성과 없이 끝났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선언한 이후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 방벽을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다양한 차원의 물리적 차단 조치를 벌이는 현재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한민족 개념 유지가 이득이 되는지에 대한 판단이 불과 몇십년 사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당시 북한은 대전차 방어용 방벽을 영구분열을 위한 차단물로 왜곡하면서 대남비난에 활용했다"며 "이는 북한이 남북 도로 및 철도를 파괴하고 물리적 장벽을 설치하는 모습과 배치되는 행태"라고 설명했다.  

판문점 북측 회담시설인 '통일각'의 모습. 사진 청와대공동취재단

판문점 북측 회담시설인 '통일각'의 모습. 사진 청와대공동취재단

국호 표기 두고 신경전도  

통일부가 이번에 공개한 문서에는 북한이 2국가론을 주장하는 현재와 달리 남북을 서로 다른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담겨있었다.

북측 단장인 백남순은 1989년 11월 15일 제4차 예비회담에서 "고위당국자회담 또는 총리회담이라는 귀측의 회담명칭에는 우리 인민의 통일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지 못하며 나라와 나라사이의 회담에서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명칭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주장했다.

앞서 북한은 '경제회담의 진전여부는 전적으로 남측의 태도여하에 달려있다'는 제목의 1985년 11월 21일자 노동신문 보도를 통해서도 국호 표기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북남경제회담에서 채택하는 합의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채택하는 합의서가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같은 민족끼리 경제협력과 교류를 실현하기 위해 채택하는 합의 문건인 만큼 서명란에다 국호를 써넣을 필요는 없다"면서다.

남북대화 사료집 12, 13권과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 제2권 표지.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남북대화 사료집 12, 13권과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 제2권 표지.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北 '고난의 행군' 징후도 

당시 회의록에서는 수백만 명의 아사로 이어진 1990년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앞둔 북한의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았던 징후도 포착됐다. 1989년 3월 2일 고위급회담 2차 예비회담이 열린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선 약 11분간의 정전으로 회담이 중단됐다. 정전으로 회담장이 어두워지자 남측 대표는 "촛불이라도 (켜자)"고 제안했고, 북측대표는 "자 물이나 마시면서, 전기 오면 합시다"라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도 했다.

이후 남측 대표는 "우리는 요즘 전기가 상당히 풍부하다"면서 "그런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가 빨리 남북교류도 많이 확대해 가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에 북측 대표는 "오늘 어떻게 돼서 이렇게 (정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력은 우리가 옛날에도 남측에 보내주겠다고 그랬다"고 응수했다.

이번 문서 공개는 2022년 첫 공개 이후 여섯 번째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문서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경제회담(1984년 11월~1985년 11월)과 남북국회회담 예비접촉(1985년 7~9월),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1989년 2월~1990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로 열린 로잔 남북체육회담(1985년 10월~1986년 6월) 등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포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