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이 현실화하자 국내 산업계는 '트럼프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 찾기에 나섰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서명한 행정명령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이 현실화하면서 자동차·반도체·철강 등 산업계 전반에 위기감이 고조하는 가운데, 사업 기회가 오히려 확대될 것을 기대하는 분야가 있다. 미국 내 인프라 투자 확대로 건설·전력기기 분야가 대표적이다.
13일 산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내 노후한 인프라 시설에 투자를 늘리겠단 방침을 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현지시간) 미 재무부와 상무부에 국부펀드 설립을 지시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정부 투자기금을 설립해 고속도로·공항 등 인프라 사업이나 의료 연구 등 ‘위대한 국가적 사업’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서명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국부펀드가 생길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라며 “우리는 이 기금을 통해 많은 부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건설 장비 업계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내 인프라 투자 확대에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HD현대인프라코어의 건설 장비 대형휠로더 DL420A-7M. 사진 HD현대
국내 건설 장비 업계는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 현지 생산 시설을 늘리는 것도 호재다. 스캇 박 두산밥캣 부회장은 지난 10일 기관투자자 설명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해 온 인프라 투자가 실현되면 건설 장비 수요에 긍정적일 것”이라며 “두산밥캣은 미국 내 생산 비중이 높아 보호무역 기조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라고 말했다. 두산밥캣의 지난해 북미 매출 비중과 생산 비중은 각각 74%, 67%였다. HD현대인프라코어와 HD현대건설기계도 올해 북미·유럽 시장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25%, 14%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HD현대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와 트럼프 행정부의 인프라 투자 확대 기조는 건설 장비 수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산밥캣은 북미 생산 비중이 67%에 달해 미국 관세 영향이 크지 않다고 밝혔다. 사진은 스캇 박 두산밥캣 부회장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관투자자 설명회에서 성장 전략을 발표하는 모습. 사진 두산밥캣
건설 장비 업계가 기대감을 갖는 건 트럼프의 관세 타깃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2010년대 이후 북미 시장 진출을 본격화한 국내 건설 장비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만큼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건설장비 전문지 KHL이 발표한 글로벌 건설장비 기업 순위에 따르면 두산밥캣은 매출 점유율 3.1%를 차지해 10위에 올랐고, HD현대인프라코어(1.5%)와 HD현대건설기계(1.2%)는 각각 20위, 21위에 올랐다. 1~3위엔 미국 캐터필러(16.8%), 일본 고마쓰(10.4%), 미국 존디어(6.1%)가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한 건설 장비 업계 관계자는 “건설장비 산업은 미국의 영향력이 커 미 정부가 무역 보복을 노리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라며 “국내 기업들은 미국 정부와 기업의 건설 투자 확대를 기회 삼아 시장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내 전력 인프라 수요 증가가 국내 전력기기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사진은 구글의 데이터센터 모습. 사진 구글
국내 전력기기 기업도 미국 내 전력 인프라 교체 흐름을 기회로 보고 있다. 지난 2020년 미국 에너지부(DOE) 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형 변압기의 약 70%가 설치된 지 25년이 지나 노후한 것으로 나타났다. DEO는 지난달 16일 8개 전력회사의 전력망 현대화 사업에 229억2000만 달러(약 33조2480억원)의 대출을 보증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등 정보 기술 발달에 따라 데이터센터가 늘면서 전력 인프라 수요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21일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5000억 달러(약 725조원)를 투자해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전력기기 업계는 변압기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관세 강화를 우려하고 있다. 사진은 울산 동구 HD현대일렉트릭 공장 모습. 사진 HD현대일렉트릭
젼력기기에 대해 미국은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고 있긴 하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2012년 한국산 수입 변압기가 자국 산업에 피해를 줬다며 14.9%~29%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지난해까지 11차례의 연례 재심을 거치면서 관세율은 조정됐지만, 여전히 최고 10.6%의 관세가 유지되고 있다. 국내 전력기기 업계는 미국 현지 생산을 늘려 관세에 대응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미국 앨라배마 공장 증설에 1850억원을 투자해 생산능력을 30% 높일 계획이다. 지난해 1000억원을 투입해 경남 창원 공장과 미국 테네시주 공장을 증설한 효성중공업은 올해도 현지 공장 추가 증설을 계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력기기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의 다음 타깃이 될까 봐 우려가 되는 측면도 있다. 정부는 자동차·반도체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다”라고 말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당시부터 인프라 투자를 강조해왔지만, 관세 등 무역 장벽을 넘어서 우리 기업까지 이익을 볼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라며“트럼프는 무역·재정 적자 해소, 자국 산업 보호와 같은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마약 문제 등 비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관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어떤 분야에, 어떤 목적으로 관세를 부과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해서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삼권 기자 oh.sam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