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띄우고, 거물 만나고…시도지사 전국시대,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다 [월간중앙]

중원 노리는 시·도지사 전국시대

여의도서도 “개헌 적기”, 벌써부터 잠룡에게 힘 실어줘
필드 플레이어 아니더라도 정권 창출 산파 역할 할 듯

순항하던 대한민국호가 흔들리고 있다. 경제, 외교, 안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적신호가 켜졌다. 국가적 위기를 해결해야 할 여의도 정치권은 둘로 쪼개졌다. 중앙행정부는 리더의 부재로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별 중요 정책 발표가순연되거나 무기한 연기됐다. 대한민국은 12·3 비상계엄 사태를 기점으로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인용 여부와 별개로 분권형 개헌 요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이유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와 리스크가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다.

비전·정책 영향력 커져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지금이 개헌의 적기”라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최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대통령·국회 권력 분산을 취지로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존경하는 여야 의원 여러분, ‘파도를 탓하지 말고, 바람을 없애라’는 옛 말씀이 있습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개헌이라고 확신합니다. (중략)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때가 왔습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권력의 분산을 통한 건강한 견제와 균형의 회복입니다.”

분권형 개헌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주요 시·도지사들의 행보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특히 대선주자급 시·도지사들의 출마 여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주요 시·도지사들의 비전과 정책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시·도지사들이 여의도 정치권을 향해 개헌을 주문하고, 국회의원들이 이를 경청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87체제 극복을 위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는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주요 인사 40여 명이 집결했다.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87체제 극복을 위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는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주요 인사 40여 명이 집결했다. [연합뉴스]

일례로 지난 12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에는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주요 인사 40여 명이 집결했다. 오 시장은 당시 “1987년 헌법 체제 극복의 핵심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계를 허물고 지방정부로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데 있다”고 힘줘 말했다.

다른 시·도지사들도 개헌에 관한 구상을 공개하며 개헌론에 힘을 싣고 있다. 유정복 인천시장(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장)은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헌을 통해 지방분권을 지향함을 밝히고 자치조직·재정·인사에 대한 권한과 책임 등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 이후 정국의 혼란을 보는 것 같다”라는 김태흠 충남지사는 “지금이 바로 개헌의 적기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도지사들의 광폭 행보도 눈에 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조기 대선 출마의사를 여러 차례 밝힌 김영록 전남지사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홍 시장은 “신년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은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전직 대통령 예방이 대선 출마 공식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표적인 ‘친윤’ 성향 단체장으로 꼽히는 이철우 경북지사는 최근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대구 동대구역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그는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도지사는 연설을 못 하게 돼 있다”며 애국가를 불러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2월 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국가비상기도회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월 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국가비상기도회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시·도지사들의 새해 소망에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바로 선 정의, 굳건한 경제,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새 길을 열어야 한다”며 “새 길을 열기 위해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금의 시국이 새해를 맞는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한다”면서도 “어려운 시국 속에 부산시는 민생 안정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최우선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대선을 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일 수 있다. 특히 국민의힘 출신 시·도지사들이 대선을 전제로 움직이다가는 자칫 경쟁자의 ‘배신자 프레임’에 걸려들 수 있다. ‘배신자 프레임’의 위력은 유승민 전 의원의 사례를 통해 익히 검증됐기 때문에 언행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잰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탄핵이 인용되는 순간부터 60일 후 대선이 치러진다. 시간이 촉박해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 스텝이 꼬일 수 있다. 마침 경선 기간에는 단체장 직을 내려놓지 않아도 돼 부담이 적다.

2월 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국가비상기도회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월 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국가비상기도회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변방 장수의 구상 알릴 ‘기회의 장’

직접 필드 플레이어가 되지 않더라도 정권 창출의 밀알이나 산파 역할을 하기 위해 플랜을 짜놔야 한다. 내년 6월로 예정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위해 비전과 플랜을 가다듬고 홍보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조기 대선은 주요 시·도지사들에게 여러 의미에서 기회의 장인 셈이다. 이는 과거 사례로 증명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19대 대선 상황을 보자. 당시 더불어민주당 경선은 문재인 전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이 빅3로 꼽혔다.

문 전 대표가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 대세론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안 지사, 이 시장이 도전장을 내미는 구도였다. 안 지사는 충남지사 재선에 성공하며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민주당 인사지만 중도적인 색채가 강해 보수 유권자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중도 확장성 만큼은 문 전 대표를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안 지사는 경선 기간 중도 보수층의 지지에 힘입어 문 전 대표 대세론을 위협하기도 했다. 비록 문 전 대표에게 밀려 경선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비서를 상대로 한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문재인 다음은 안희정’이라는 말이 여의도에서 심심찮게 들렸을 정도로 조기 대선 국면에서 인지도와 대중성을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모라토리엄 극복, 각종 현금수당 등 가시적 성과를 내세우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스펙트럼이 넓은 민주당 내에서도 강경한 개혁 성향 인사로 분류되며, 재벌 기득권 독점 체제 해체와 기본소득제도 등 개혁 성향이 강한 지지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기성 정치인이 생각만 했지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들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이 크게 어필한 것이다. 경선 당시 문 전 대표가 대세론을 바탕으로 안정감을 어필했던 것과 뚜렷이 대비됐다.

이 시장은 비록 당시 경선에서 안희정에 이은 3위를 차지했지만, 얻은 것은 그 이상이었다. 대선 토론회는 변방 장수의 파격적 구상을 전국에 알리는 무대였다. 이후 이 시장은 경기지사, 20대 대선 민주당 후보, 인천 계양을 재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표 등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자 호남권선출대회가 2017년 3월 27일 광주여대 유니버시아드체육관에서 열린 가운데 안희정, 이재명, 문재인 후보가 연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오종택 기자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자 호남권선출대회가 2017년 3월 27일 광주여대 유니버시아드체육관에서 열린 가운데 안희정, 이재명, 문재인 후보가 연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오종택 기자

임기 3년차 성과 강조할 듯

만약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민주당은 구도적으로 과거와 같은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이재명 대표가 대세론을 형성하는 가운데 김동연 경기지사와 김영록 전남지사가 도전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디테일에서는 과거와 다르게 흘러갈 공산이 크다. 이 대표는 안정감을 줬던 과거 문 전 대표와 달리 조기 대선을 앞두고 논쟁적인 메시지를 내고 있다. 반도체특별법 관련 토론회에서는 ‘주 52시간제’ 예외 인정을 언급한 뒤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는 ‘주 4일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띄웠다. 이에 실제 조기 대선이 시작돼 민주당 경선을 치른다면, 여러 예비후보가 이재명식의 여러 파격 공약을 난타하는 장면이 연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힘은 뚜렷한 대세론 없이 지방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나 다름없다. 기원전 260년경 전국칠웅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겨뤘던 것처럼, 국민의힘 내에는 7명의 대선주자급 시·도지사의 대권 도전이 점쳐진다. 김진태 강원지사, 김태흠 충남지사, 박형준 부산시장, 오세훈 서울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이철우 경북지사, 홍준표 대구시장이 그 주인공이다(가나다순).

헌재가 윤 대통령 탄핵을 인용해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국민의힘은 어떻게든 흥행몰이에 나설 공산이 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치러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선 경선은 보수 정당 역사상 가장 흥행에 실패한 선거로 꼽힌다. 박근혜 독주로 흥행에 실패했던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투표율 41.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투표율 18.7%를 기록했다. 당시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당선된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본선에서 득표율 24.03%를 기록한 건 어찌 보면 선전이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시·도지사가 조기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어 흥행을 이끄는 것이 베스트 시나리오다.

결국 주요 시·도지사들이 자기 지역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 비전을 제시하는 모양새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마침 민선 8기 임기 3년 차이기 때문에 시·도지사별로 내세울 만한 성과는 적잖이 쌓여 있는 상태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이재명 대표를 이길 유일한 후보라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과연 중원을 차지하는 이는 누가 될 것인가. 시·도지사 전국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