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체면 세워주고 실리는 물밑 협상서 챙겨야" [월간중앙]

DEEP INSIGHT | 협상가 트럼프를 대하는 실리 외교 노하우 
 
정치 리더십 공백기는 외국 사례 분석해 대응 전략 마련할 절호의 기회
“‘무임승차’를 ‘이익 균형’ 프레임으로 바꿔야 방위비 분담금 협상 수월”
“협상력과 국력 비례하지 않아…트럼프 추켜세운 멕시코 대통령 참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2월 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종일관 ‘아부의 예술’을 보여줌으로써 회담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이끌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2월 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종일관 ‘아부의 예술’을 보여줌으로써 회담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이끌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2월 7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일본의 성과가 작지 않았다. 우선 미국은 일본에 핵우산 제공을 재확인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북한 비핵화가 공동목표로 명시됐다. 북한에 대응하고 지역 평화와 번영을 수호하는 데 한·미·일 3국 간 파트너십의 중요성도 강조됐다. 그러나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나 상호관세 부과와 같은 양국 간 긴장요소에 대해서는 구체적·명시적 언급이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쌓는 것을 회담의 핵심 목표로 삼은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종일관 ‘아부의 예술’을 보여줌으로써 회담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이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손자들을 위해 황금빛 사무라이 투구도 선물했다.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과 성향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등 오래전부터 정상회담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25% 관세를 부과하고 자동차·반도체·의약품에도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답은 지난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 파리에서 개최된 한 외교 만찬에서 샤를 베르젠 프랑스 외상이 건배사를 했다. “루이 16세 폐하는 달과 같이 대지를 부드럽고 자애로운 빛으로 채운다.” 이어서 영국 대사가 말했다. “조지 3세는 정오의 태양처럼 세상을 밝게 비춘다.”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대사가 응수했다.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이 성경의 여호수아처럼 태양과 달을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업으로 하는 외교관과 정치인은 아부에 능하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전략적 아부를 통해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양보를 얻어낸다. 호의와 신임을 얻기 위해 선물도 주고받는다. 자신은 과대망상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상대의 과대망상을 부추길 줄 알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韓, 프레임 전쟁서 승기 잡는 게 급선무”

 
국제안보와 통상질서의 시대적 전환에 직면한 각국 정치 지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친분을 맺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의 리더십에 경쟁적으로 경의를 표하고, 의미 있는 선물을 마련한다. 개인적 친밀감이 협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역사의 위대한 귀환’이라고 치켜세웠고 지난 2월 초 개최된 정상회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엄청난 존경’을 받는 ‘위대한 친구’라고 칭송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트럼프의 ‘결단의 리더십’과 ‘힘에 의한 평화’에 대한 헌신을 찬양했다.

개인적 관계 구축이 호의 조성과 대화 촉진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상 정치 지도자 간 개인적 친밀감이 국가 간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례는 많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충성심, 존경과 자기 주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의 자부심, 정치적 성취와 개인적 가치를 반영하는 찬사와 선물을 신중하게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 친밀감이 반드시 정책의 양보나 합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해, 명확한 협상 목표 및 전략적 소통과 결속되지 않을 경우 효과는 제한적이다. 더구나 국민이 바라는 것을 정확히 읽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하겠다는 공약으로 재선된 ‘협상의 달인’ 트럼프가 아부나 선물에 휘둘릴 리 만무하다. 국가 간 협상이 지나치게 개인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장기적 관계 형성 및 유지를 중요시하는 관계 지향(relationship-oriented)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가 정보와 사실에 기초한(information and fact-based) 문화권 사람들과 협상할 때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와 어떻게 협상해야 할까?

우선, 트럼프 행정부의 ‘무임승차 동맹’ 프레임을 ‘이익 균형 동맹’으로 바꿔야 한다. 프레임은 협상 당사자의 인식 형성, 협상의 진행과 의사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경쟁이 아닌 상호 이익 관점에서 프레임을 짤 경우 협상 타결과 협력 가능성은 커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들이 자국 방위에 미국을 이용한다고 믿는다.

대선 과정에서 한국이 ‘현금 인출기’라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 달러를 주장한 이면에도 이런 사고가 자리한다. 우리 정부는 한·미 동맹이 편승이 아닌 이익 균형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설득해야 한다.

한국은 지난 70여 년간 군사, 경제, 기술 등 많은 분야에서 미국의 핵심 파트너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미·중 전략 경쟁으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다. 특히, 해외 최대 미군 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 특히 해군력 증강에 대응하려는 미국의 전략목표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은 미국의 해군함정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분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 기업의 막대한 대미 투자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됐고 반도체, 원전, 배터리, 자동차, 사이버, 우주, 인공지능 등 여러 분야에서 ‘윈-윈(Win-Win)’하는 핵심 파트너가 될 수 있음도 강조해야 한다. 또한 GDP 대비 2.8%의 국방비 지출을 선제적으로 증액해 무임승차 인식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프레임을 바꿔야 4년 내내 있을지도 모를 트럼프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미국의 확장 억제를 지속해서 보장받고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역할 변경 카드에도 대응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창의적 협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불허 아이디어와 위협으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린 후 목표 달성을 꾀한다.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의 지배, 캐나다의 미국 편입, 미국이 가자지구를 맡아 재건하겠다는 ‘가자 구상’ 등이 예다. 이런 점에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한 닉슨 전(前) 대통령과 닮았다. 닉슨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북베트남을 압박해 파리 평화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고자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했다. 당시 닉슨은 공산주의 진영을 향해 자신이 충동적·비이성적이며, 목표를 위해서는 핵을 포함해 어떤 극단적 선택도 불사할 인물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해 10월에는 전 세계 미군에게 핵전쟁 경계령을 내리고 대규모 무력시위도 병행했다. 그러나 소련과 북베트남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전략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트럼프가 닉슨과 다른 점이라면 적과 동맹국을 구분하지 않고 이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진 실용주의자다. 거래 중심적 접근을 하는 그에게 이념이나 가치는 의미가 없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18년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진 실용주의자다. 거래 중심적 접근을 하는 그에게 이념이나 가치는 의미가 없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18년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최종 목표는 美 국내 승리 주장”

 
‘미치광이 전략’과 같은 강압 외교에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독창성과 유용성을 갖춘 창의적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일 의제를 이익 균형 관점에서 안보와 경제가 융합된 복수 의제로 전환해 패키지 딜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에 대해서는 확장 억제 강화와 물자와 용역의 현물 제공, 미국 제조업과 공급망 복원에 대해서는 우리 기업의 참여 방안 확보 등 복수의 제안을 연계함으로써 통합적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외에도 우회적 보상, 파이 늘리기, 상대편의 비용 절감 등 다양한 선제적·창의적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적 연대도 필요하다. 예컨대 북·미 협상, 북한의 비핵화와 한·미·일 안보 협력에 대해 일본과 공조가 가능하다. 경제적 압박에 대해서는 우리 기업이 진출해 있는 주의 상·하원 의원, 협력기업, 시민사회 등 주요 이해 관계자를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협상 스타일을 이해하는 것은 협상 성공의 지름길이다. “인사가 정책이다”라는 금언처럼 내각이 ‘충성파’ 중심으로 구성된 점에 비춰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이 특히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진 실용주의자다. 거래 중심적 접근을 하는 그에게 이념이나 가치는 의미가 없다. 전통적 외교 규범이나 관행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는 접근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제안을 공격적으로 함으로써 협상을 주도한다. 닻 내리기 효과(anchoring effect)를 노리는 것이다. 높은 기준점에 닻을 내리게 함으로써 자기 페이스로 협상을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즉, 트럼프의 최초 제안은 결코 최종 제안이 아니다. 안보를 위해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미국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방위비 분담금으로 한국이 100억 달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 NATO 회원국들의 GDP 5% 국방비 지출 주장이 예이다.

이런 경우 조급하고 감정적인 대응은 금물이다.

상대방 제의에 신경 쓰지 말고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우리 제의를 마련해 제시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선과 악,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고 직관적·본능적 성격의 소유자다. 이를 고려해 메시지는 간결, 명확하게 하고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미국이 얻게 될 단기적·가시적 이익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대통령 공백기 한국, 트럼프 학습 기회”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대화와 공개 협상을 선호한다. 대립을 피하고 트럼프가 국내적으로 승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가시적 이익과 명분을 양보하되 실리를 챙기는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에 대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신임 멕시코 대통령의 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25% 관세 부과 위협에 공개적으로 맞대응하는 대신 신중하고 절제된 접근 방법을 택했다. 자국의 보복 조치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았고 국경 보안을 강화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도록 교묘히 방치했다. 관세 부과는 한 달간 유예됐고 셰인바움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등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적으로 ‘승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관세부과 위협에공개적으로 맞대응하는 대신 신중하고 절제된 접근 방법을 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적으로 ‘승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관세부과 위협에공개적으로 맞대응하는 대신 신중하고 절제된 접근 방법을 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지도자를 신뢰한다. 그가 시진핑, 푸틴, 김정은 등 스트롱맨들과의 개인적 유대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 중에서는 약속을 행동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존중한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 부재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지속하고, 정상외교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은 한국에 불리하다. 그러나 초조해하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부재를 이유로 주요 문제에 대해 시간을 벌고 결정을 늦출 수도 있다.

한국이 미국보다 국력은 열세이나, 협상력은 반드시 국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역사에는 협상력을 활용해 약소국이 강대국에 협상 우위를 차지한 사례가 많다. 협상력은 최상의 대안(BATNA), 자원에 대한 통제, 협상가의 지위, 전문 지식, 윤리성, 선례, 끈기, 설득력, 합법성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시간과 정보도 협상 성패에 영향을 미친다. 약소국이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이유는 협상력이 객관적 실체가 아닌 주관적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협상력은 상황과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미국의 대외정책도 여론, 중간선거, 의회 등 여러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진화한다. 비전통적 협상가인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우선순위와 협상 스타일을 고려한 맞춤형 전략을 마련하고냉철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박희권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사, 스페인 마드리드 자치대 법학박사(국제법), 영국 전략문제연구소(IISS) 연구원, 유엔 차석대사, 페루·스페인 대사를 역임했다. 세종 우수 교양도서 〈쉘 위 니고시에이트?〉 저자

 
박희권 한국외대 LD학부 석좌교수 heekwon7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