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투자하란 건지…" 美10억달러 청구서에 車업계 당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 장관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 장관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 투자하라는 것인지, 이미 투자한 금액을 포함해준다는 얘기인지 혼란스럽다.”

국내 완성차업계 임원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의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투자” 발언에 대해 24일 중앙일보에 한 말이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 등 국내 기업인들로 구성된 경제사절단을 만나 “10억 달러 이상 투자하면 투자 심의나 환경영향 평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패스트트랙’에 태워주겠겠다”고 말하며 투자 확대를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자동차 관세 부과 시행(3월말~4월 2일)을 한 달여 앞두고 국내 자동차 업계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10억 달러’라는 구체적인 액수가 흘러나오면서 일각에선 요구가 지나치다는 반응도 나온다. 

지난해 미국에서 170만8293대를 판매하며 역대 판매량 최고치를 경신한 현대차·기아의 고심이 가장 깊다. 올해 준공될 미국 조지아주 신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투자금은 76억 달러(10조8000억원)로, 이미 10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이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집행된 터라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에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처가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촬영된 미 조지아주 '현대차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의 건설 현장. AP=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촬영된 미 조지아주 '현대차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의 건설 현장. AP=연합뉴스

 
이에 업계에서는 현대차·기아가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 신기술 분야에서 투자 프로젝트를 찾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우위에 있는 신기술 관련 대미 투자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눈에 들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트럼프 취임 직후 미국에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내용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5000억 달러(약 728조원)의 대미 투자를 밝힌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내년 초 부지가 확정될 예정인 현대제철 미국 신공장 건설 계획이 조기에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이 공장을 짓는 데 10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게 제조업 일자리라는 전제 하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공장을 짓는 것”이라며 “신기술 투자의 경우 일자리를 줄이지 않는 부문에 한해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생산 늘리는 글로벌 車업계

현대차·기아와 미국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자동차 업체는 미국 생산 확대를 발표하고 있다. 독일 자동차업체 메르세데스-벤츠는 고급 스포츠유틸리티차(SUV) ‘GLE’ ‘GLS’ 및 전기 SUV ‘EQE’ 등이 생산되는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C클래스, E클래스 모델을 추가 생산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현재 60% 수준인 현지 생산 비중을 70%까지 늘린다. 미국 오토모티브뉴스에 따르면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경영자는 최근 투자설명회에서 “생산라인을 재배치하는 것은 최소 2년에서 최대 4년이 걸리지만 우리는 미국에서 더 큰 성장을 하고 싶다”며 대미 투자 확대 계획을 밝혔다.

토요타 텍사스주 공장. 사진 토요타

토요타 텍사스주 공장. 사진 토요타

 
그간 꾸준히 미국 현지 생산을 늘려온 일본 자동차업체는 현지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토요타가 140억 달러(18조6000억원)를 투자해 설립한 노스캐롤라이나 배터리 공장은 4월부터 전기차, 하이브리드차량 배터리를 생산해 출하한다. 토요타는 지난 5일 홈페이지를 통해 “배터리 공장은 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토요타는 지금까지 490억 달러의 대미 투자로 28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토요타는 100억 달러(14조2000억원)를 투자해 조지타운·텍사스 공장도 확장하고 있다.

철수설 위기 더 커진 한국GM 

미국 전통 3사 중 하나인 제너럴모터스(GM) 역시 미국 내 증산을 검토하고 있다. 폴 제이콥슨 GM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11일 울프 리서치 콘퍼런스에서 “관세가 장기화하면 완성차·부품 생산을 (미국 내로) 전환하는 추가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GM의 위기감은 더 커졌다. 한국GM이 지난해 생산·판매한 차량 49만9559대 중 미국 수출분은 41만8792대로 83.8%에 달하는데 관세 25%를 부과하면 직격탄을 맞는다.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2018년 군산공장을 폐쇄한 GM이 트럼프 관세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철수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