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겜’ 시각효과로 美에미상 받고 중국 무협으로 세계 공략 중인 이 회사

지난 10일 오후 경기 일산 컬리버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정재훈 대표. 전민규 기자

지난 10일 오후 경기 일산 컬리버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정재훈 대표. 전민규 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2’에는 탈락자가 대거 발생하는 첫 번째 트리거로 벌이 등장한다. 참가자 196번(송지우)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 도중 목에 붙은 벌에 놀라 움직이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다. 이후 벌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196번의 볼 위로 올라왔다가 유유히 사라진다.

걸리버 스튜디오는 '오징어 게임2'의 벌을 구현하는 과정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걸리버 스튜디오는 '오징어 게임2'의 벌을 구현하는 과정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이 벌은 씨제스 걸리버 스튜디오(이하 걸리버)가 만든 가짜다. 벌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구현해 현실성을 부여했다. 이외에도 456억이 쏟아지는 돼지 저금통, 빠르게 도는 팽이 등의 소품부터 폭풍우가 치는 바다, 총싸움이 벌어지는 계단과 같은 규모있는 공간까지 걸리버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섬세하면서도 스케일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낸 이 회사는 한국 CG/VFX(컴퓨터 그래픽/시각효과)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회사 설립 3년만인 2022년에는 ‘오징어 게임1’로 미국 에미상의 특수효과 부문을 아시아 최초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돈통도 걸리버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가짜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돈통도 걸리버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가짜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지난 10일 경기도 일산 본사에서 만난 정재훈 걸리버 대표는 “과거에는 CG가 후반작업 정도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프리프로덕션(사전 제작) 단계부터 참여한다”며 상업 콘텐트에서의  CG/VFX 위상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1998년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다수의 영화, 드라마 VFX를 담당한 베테랑이다. 영화 ‘황해’(2010) ‘곡성’(2016) ‘서울의 봄’(2023) ‘시민덕희’(2024), 디즈니 플러스 ‘카지노’(2023),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쇼’(2024), 아마존 프라임 ‘버터플라이’(2025) 등에 참여했다.

6월 27일 공개되는 ‘오징어 게임3’ 기술 작업에도 힘을 보탰다. 정 대표는 “황동혁 감독이 많이 믿어주셔서 작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작업 이후 보안 유지에 가장 신경쓰는 중”이라고 했다. 정 대표는 황동혁 감독과 영화 ‘수상한 그녀’(2014), ‘남한산성’(2017) 등으로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왔다.


정 대표가 본격적으로 영화 산업에 발을 들인 데에는 나홍진 감독 영향이 컸다. “돈이 우선했다면 게임 산업으로 업을 옮겼을 수도 있겠으나, 나 감독과 작업하면서 영화업의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정재훈 대표는 "영화 '황해' 이후 CG가 단순한 그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영화의 재미를 알았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정재훈 대표는 "영화 '황해' 이후 CG가 단순한 그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영화의 재미를 알았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황해’를 찍으면서 모든 팀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CG로 그림만 그리려고 했다면, 나 감독을 만난 이후 ‘연출 의도에 맞춰 그림을 끌고 간다’는 말이 이해가 갔죠. ‘곡성’을 작업할 땐 엔딩크레딧까지도 영화의 완성이란 것을 배웠습니다. 직원들에게도 그림 하나에만 몰두하지 말고, 작품의 목적성을 떠올리면서 작업하라고 조언합니다.”

지금까지도 정 대표는 ‘협동심’을 가장 우선 가치로 여긴다고 했다. 직원을 뽑을 때도 개인의 전문성보다는 인성을 눈여겨 본다. “상업예술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혼자 튄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부연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른 산업 특성상, 끊임없는 학습과 적응도 요구된다. 예를 들어 ‘카지노’에서 최민식의 젊은 시절을 구현할 때는 얼굴에 점을 찍어 위치를 추적했지만, 지금은 AI가 얼굴을 자동 인식해 작업 효율이 30% 이상 향상됐다고 한다. 걸리버는 이러한 AI 기반 자동화 기술을 자체적으로 도입하며, 노동집약적이던 CG 작업을 점차 효율화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의 대치상황은 CG/VFX를 통해 구현됐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영화 '서울의 봄'의 대치상황은 CG/VFX를 통해 구현됐다. 사진 걸리버 스튜디오 유튜브

 
걸리버는 에미상 수상 이후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직원 50여 명으로 시작해, 현재 미국·중국·인도·러시아·스페인·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의 전문 인력 100명 이상이 근무한다. 해외 OTT와 중국 콘텐트와의 협업 기회도 늘었다. 지금은 중국 무협 작품의 VFX를 작업 중이다. 또 넷플릭스와의 협업 이후 할리우드 시스템을 간접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시장 진출에 용이한 기술 세팅을 도입해 차별화를 두고 있다.

정 대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회사로 만들고 싶다. 당장 중요한 건 안정적으로 이 업을 유지하는 것이다. 국내 콘텐트 제작 편수가 줄고 투자가 위축되면서 VFX 회사들도 함께 어려워지고 있는데,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높은 퀄리티의 콘텐트를 함께 만들고 싶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