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우리 엄마 같아…옆에 있는데 왜 멀리서 찾죠"

첫 산문집 30년 만에 다시 낸 김창완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김창완. TV에 출연하는 분 맞나 싶을 만큼 털털하고 편 한 차림으로, 특유의 함박미소와 함께 카메라에 섰다. 김상선 기자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김창완. TV에 출연하는 분 맞나 싶을 만큼 털털하고 편 한 차림으로, 특유의 함박미소와 함께 카메라에 섰다. 김상선 기자

3월 26일부터 4월 17일까지 인사동 아르떼숲 갤러리에서 김창완(71)의 그림 전시 ‘이제야 보이네’가 열렸다. 그의 그림은 그가 지금까지 수없이 들려준 노랫말들과 닮았다. 어떤 것은 소년처럼 개구지고, 어떤 것은 늙은 시인처럼 생각이 많다. 마침 4월 10일엔 그의 아트토크가 열렸다.

“요새 와서 내가 알아왔던 아름다움이 진짜인가 회의가 생겨요. 여기 ‘희망(HOPE)’이라는 작품이 걸려 있는데, 뭐 시커멓게 칠해놓고 이게 무슨 그림인가 하실 거예요.(웃음) 어머니가 6년 전부터 보청기를 끼시는데, 그러시고도 제 공연에 와서 참 재밌게 보곤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급격히 소리를 못 들으시는 거예요. 보청기가 막혔나, 수리를 갔더니 진짜 고장이 났다는 거예요. 보청기 수명이 5년 밖에 안 된대요. 이제 소리가 잘 들린다고 굉장히 좋아하세요. 아, 좀 덜 답답하시겠구나. 그날 ‘희망’을 그렸어요. ‘희망’ 하면 푸른 하늘, 무지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등을 생각하죠. 이건 주입된 희망 아닐까? 결국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일상이 곧 희망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뭐, 주저리주저리 그럴듯하게 그림을 포장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름다움도 이렇게 교육받은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아름다움이 뭐지? 꽃이 왜 아름답지? 질문합니다. 혹시나 누가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새 글 8편과 시, 그림 20점 새로 담아
아트토크 후 막걸리 한 잔과 함께한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궁색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캔버스를 마주한다고 했다. 가수면서, 작곡가고, 가사도 쓰면서, 동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라디오 DJ도 하고, 연기도 한다. 그림은 또 무슨 계기로 언제부터 그리게 된 걸까. 그는 이 질문에 휴대폰에서 그림 하나를 찾아냈다. “2016년에 그린 ‘기도’라는 그림이에요. 그림 속 숫자들은 획을 그은 순서에요. 인간의 번민을 뜻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숫자가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해요.” 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는지에 대한 대답은 며칠 후 그가 요즘 진행하는 SBS러브FM ‘6시 저녁바람 김창완입니다’ 오프닝 멘트를 통해 들려줬다. 그는 오래 전부터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쓴다.

“책도 나오고 전시회도 있고 해서 기자 분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림은 왜 그리기 시작했냐고 물어요. 아니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리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 거기 왜가 왜 붙나 해서 ‘글쎄요’ 하고 말았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도대체 왜 머리 쥐어 뜯어가며 캔버스 앞에 서는 걸까? 어른들 말씀 맞다나 거기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폰을 뒤져보니 2016년 9월 쯤 연필로 그린 기도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더군요. 어렴풋이 그 그림을 그리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아침창(이전에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하면서 사극 찍고 정신없이 바쁠 때였어요. 그래서 그랬겠지요. 먹고 사는 일에서 잠깐 비켜 서 있어보자 했던 것 같아요. 하도 나를 소비하는 것 같아서….”

최근 김창완의 첫 산문집이 30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새 글 8편과 시, 그리고 그림 20점을 더해 다시 선보인 책이다. 서초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 김창완씨는 역시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기자를 반겼다. 얼마 전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고 빈티지 오디오 소리를 들려주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다.


30년 된 첫 산문집을 다시 발간한 사연이 있나요.
“다른 제목으로 내도 좋다고 할 만큼 지금의 내 모습이 많이 담겨 있어요. 이전 책이 과거지사를 담았다면, 이번에 출간한 책은 현재를 담고 있어요. ‘이제야 보이네’라는 제목을 그대로 뒀지만, ‘지금 비로소 보네’라는 뜻이 더 있어요. 작금의 신경을 담고도 싶었고요.”
 

새롭게 ‘이제야 보이는’ 순간이 있나요.
“지금 나를 비추는 햇살이나, 바람이나 이런 것을 느끼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둔해졌어요. 옛날에는 진짜 막 푸른빛이 나는 유리 조각들 같은, 짧은 글 안에서도 그런 것들을 담아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글쓰기가 안 돼요. 안 하게 돼요. 그냥 평양냉면 같은 게 좋아.(웃음) 그렇다고 사람이 수더분해진 것도 아닌데. 근력도 많이 약해졌어요. 무거운 걸 들기 싫으니까. 마음에서도 그렇지 뭐.”
 

삶이 다시 보이는, 일상의 순간을 예민하게 알아차릴 방법이 있을까요.
“나도 잘 모르는데(웃음), 핵심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그 열망을, 간절함을 놓치고서는 아무것도 건져 올릴 수 없어요. ‘뭐를 낚아야 되겠다’ 해서 그 무엇이 낚이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간절함이라는 그물을 망망대해에 드리우는 거예요. 무엇이 건져질지는 몰라요. ‘그물코를 얼마나 두껍게 할까’ ‘그물 밑에 얼마짜리 추를 달까’ 하는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매일 투망을 던지는 것도 습관이에요. 그러면 건져져요. ‘이거 빈 그물이네’ 하는 날이 많겠지만, 갑자기 빈 그물에 햇살이 잠깐 비칠 수도 있고, 내 두터운 손이 느껴지는 날도 있겠죠. 그게 우리 삶을 발견하는 일 아닐까 싶어요.”
 
라디오 DJ 활약, 오프닝 멘트 직접 써

전시장에서 아트토크 중인 김창완. HOPE라고 쓴 벽면 위 그림들이 최신작이다.

전시장에서 아트토크 중인 김창완. HOPE라고 쓴 벽면 위 그림들이 최신작이다.

‘Z세대 추구미’시죠. 젊은 가수 후배들도 함께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청년 세대에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요.
“주꾸미? 모르는 얘기만 하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웃음) ‘밥 잘 사주는 아저씨’ 이런 거겠죠.(웃음) ‘버리고 싶어서 묻어놨던 것들, 그게 결점이라도 그걸 다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청춘들한테는 위로가 될 수 있죠. ‘나는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 ‘뭔가 개선해야 한다’ 말하면서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못 던져버리는 게 누구나 있을 거라고요. 그걸 너무 캐버리려 하지 마라, 말하고 싶어요. 손에 쥔 것만 내 인생이 아니니까. 놓쳐버린 것도 내 인생이고. 못마땅한 것도 나고.”
 

젊은 독자들에게 한마디 건넨다면.
“지금 내 모습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요새 와서 ‘자기 연민’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초라한지 모르겠어요. 측은지정, 연민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말인 줄 알았는데 아주 교묘한 자기 방어술일 수도 있어요. 진짜 그거 단칼에 잘라버려야 돼요. 자기 처지가 좀 안 됐다, 좀 부족하다? 함부로 자기를 가볍게, 불쌍히 여기지 말아요. 핑계밖에 안 돼요. 먼저 행복해야 돼요.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스텝이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는 작은 도랑을 인생의 큰 장애물로 생각하고 건너갈 생각조차 안 하죠. 별것도 아닌데.”
 

내가 못나 보일 때는 어떡하죠.
“‘아유, 니가 그렇지 뭘’ 그러고 쓴 커피 마시면 되지 뭘 어떡해요.(웃음)”
 

드라마에서 악역도 잘하십니다. 동네의 정말 편한 아저씨와 비열한 악인, 너무 극과 극이잖아요.
“‘악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예술의 마지막 창조자는 ‘나’거든요. 관람이나 감상을 통해 예술 행위에 참여하는 건데, 어떤 연기자가 내 고정관념을 방해한다면 인상적일 수밖에요. 허를 찌른 달까. 그래서 내게 악역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요.(웃음)”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는 2016년 무렵의 드로잉 ‘기도’.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는 2016년 무렵의 드로잉 ‘기도’.

솔직히 연기 연습은 안 하실 것 같아요.
“내가 후배들한테 그래요. ‘라디오 DJ는 연기자야’. 라디오 DJ가 뉴스 앵커처럼 사실을 전달하는 데만 급급하면 소리에 의존하는 라디오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건조하게 들릴 거예요. 라디오 DJ가 멘트에 희로애락을 담아내려면 기본적으로 연기가 돼야 해요. 이미자씨의 ‘동백 아가씨’를 소개할 때와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소개할 때 똑같은 톤이면 안 되거든요.”
 

라디오 DJ의 역할은 뭘까요.
“그 시간에 거기 있어야 되는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들한테 그렇게 익숙해지려면 오래 걸려요. 그렇기 때문에 라디오 DJ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인기인이나 누가 오면 그 익숙함이 빨라질까?”
 

오프닝 멘트는 뭘로 쓰나요.
“(휴대폰을 쥐며) 이걸로 하죠. 원고 송고하기도 좋아요. 저는 또 자전거를 타야 되기 때문에 무거운 폰은 싫고. 그래서 손안에 들어오는 조그만 폰으로 써요.” (그가 보여주는 휴대폰 메모장에는 ‘개인 비서’ ‘그 주 아침 인사’ ‘아침창’ ‘6시 저녁 바람’ 등 여러 개 폴더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희망’이라는 그림이 자꾸 떠올라요. 중장년 세대 대부분이 바라는 것도 희망이죠.
“HOPE는, 희망은 안 보인다는 게 주제인데, 지금 바로 앞에 있는데 멀리서 찾으려니까 안 보이죠. 그 그림도 멀리서 보면 흑과 백뿐이에요.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다른 색깔의 얇은 붓질이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올해 95세신데, 70대 아들은 노래할 때마다 어머니가 공연장에 와서 내 노래를 들을 때와 아닐 때가 정말 다르거든요. 작년에 낙상을 하셔서 정신없이 지나가느라 봄꽃을 못 보여드렸어요. 그래서 올해는 봄꽃을 꼭 보여줘야지, 엄마 아이스크림 사줘야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결심해요.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희망은 그런 거예요. 손에 쥐어지고 눈에 들어오고 그러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