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문집 30년 만에 다시 낸 김창완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김창완. TV에 출연하는 분 맞나 싶을 만큼 털털하고 편 한 차림으로, 특유의 함박미소와 함께 카메라에 섰다. 김상선 기자
“요새 와서 내가 알아왔던 아름다움이 진짜인가 회의가 생겨요. 여기 ‘희망(HOPE)’이라는 작품이 걸려 있는데, 뭐 시커멓게 칠해놓고 이게 무슨 그림인가 하실 거예요.(웃음) 어머니가 6년 전부터 보청기를 끼시는데, 그러시고도 제 공연에 와서 참 재밌게 보곤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급격히 소리를 못 들으시는 거예요. 보청기가 막혔나, 수리를 갔더니 진짜 고장이 났다는 거예요. 보청기 수명이 5년 밖에 안 된대요. 이제 소리가 잘 들린다고 굉장히 좋아하세요. 아, 좀 덜 답답하시겠구나. 그날 ‘희망’을 그렸어요. ‘희망’ 하면 푸른 하늘, 무지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등을 생각하죠. 이건 주입된 희망 아닐까? 결국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일상이 곧 희망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뭐, 주저리주저리 그럴듯하게 그림을 포장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름다움도 이렇게 교육받은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아름다움이 뭐지? 꽃이 왜 아름답지? 질문합니다. 혹시나 누가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새 글 8편과 시, 그림 20점 새로 담아
아트토크 후 막걸리 한 잔과 함께한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궁색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캔버스를 마주한다고 했다. 가수면서, 작곡가고, 가사도 쓰면서, 동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라디오 DJ도 하고, 연기도 한다. 그림은 또 무슨 계기로 언제부터 그리게 된 걸까. 그는 이 질문에 휴대폰에서 그림 하나를 찾아냈다. “2016년에 그린 ‘기도’라는 그림이에요. 그림 속 숫자들은 획을 그은 순서에요. 인간의 번민을 뜻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숫자가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해요.” 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는지에 대한 대답은 며칠 후 그가 요즘 진행하는 SBS러브FM ‘6시 저녁바람 김창완입니다’ 오프닝 멘트를 통해 들려줬다. 그는 오래 전부터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쓴다.

최근 김창완의 첫 산문집이 30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새 글 8편과 시, 그리고 그림 20점을 더해 다시 선보인 책이다. 서초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 김창완씨는 역시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기자를 반겼다. 얼마 전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고 빈티지 오디오 소리를 들려주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다.
30년 된 첫 산문집을 다시 발간한 사연이 있나요.
“다른 제목으로 내도 좋다고 할 만큼 지금의 내 모습이 많이 담겨 있어요. 이전 책이 과거지사를 담았다면, 이번에 출간한 책은 현재를 담고 있어요. ‘이제야 보이네’라는 제목을 그대로 뒀지만, ‘지금 비로소 보네’라는 뜻이 더 있어요. 작금의 신경을 담고도 싶었고요.”
새롭게 ‘이제야 보이는’ 순간이 있나요.
“지금 나를 비추는 햇살이나, 바람이나 이런 것을 느끼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둔해졌어요. 옛날에는 진짜 막 푸른빛이 나는 유리 조각들 같은, 짧은 글 안에서도 그런 것들을 담아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글쓰기가 안 돼요. 안 하게 돼요. 그냥 평양냉면 같은 게 좋아.(웃음) 그렇다고 사람이 수더분해진 것도 아닌데. 근력도 많이 약해졌어요. 무거운 걸 들기 싫으니까. 마음에서도 그렇지 뭐.”
삶이 다시 보이는, 일상의 순간을 예민하게 알아차릴 방법이 있을까요.
“나도 잘 모르는데(웃음), 핵심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그 열망을, 간절함을 놓치고서는 아무것도 건져 올릴 수 없어요. ‘뭐를 낚아야 되겠다’ 해서 그 무엇이 낚이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간절함이라는 그물을 망망대해에 드리우는 거예요. 무엇이 건져질지는 몰라요. ‘그물코를 얼마나 두껍게 할까’ ‘그물 밑에 얼마짜리 추를 달까’ 하는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매일 투망을 던지는 것도 습관이에요. 그러면 건져져요. ‘이거 빈 그물이네’ 하는 날이 많겠지만, 갑자기 빈 그물에 햇살이 잠깐 비칠 수도 있고, 내 두터운 손이 느껴지는 날도 있겠죠. 그게 우리 삶을 발견하는 일 아닐까 싶어요.”
라디오 DJ 활약, 오프닝 멘트 직접 써

전시장에서 아트토크 중인 김창완. HOPE라고 쓴 벽면 위 그림들이 최신작이다.
‘Z세대 추구미’시죠. 젊은 가수 후배들도 함께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청년 세대에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요.
“주꾸미? 모르는 얘기만 하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웃음) ‘밥 잘 사주는 아저씨’ 이런 거겠죠.(웃음) ‘버리고 싶어서 묻어놨던 것들, 그게 결점이라도 그걸 다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청춘들한테는 위로가 될 수 있죠. ‘나는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 ‘뭔가 개선해야 한다’ 말하면서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못 던져버리는 게 누구나 있을 거라고요. 그걸 너무 캐버리려 하지 마라, 말하고 싶어요. 손에 쥔 것만 내 인생이 아니니까. 놓쳐버린 것도 내 인생이고. 못마땅한 것도 나고.”
젊은 독자들에게 한마디 건넨다면.
“지금 내 모습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요새 와서 ‘자기 연민’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초라한지 모르겠어요. 측은지정, 연민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말인 줄 알았는데 아주 교묘한 자기 방어술일 수도 있어요. 진짜 그거 단칼에 잘라버려야 돼요. 자기 처지가 좀 안 됐다, 좀 부족하다? 함부로 자기를 가볍게, 불쌍히 여기지 말아요. 핑계밖에 안 돼요. 먼저 행복해야 돼요.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스텝이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는 작은 도랑을 인생의 큰 장애물로 생각하고 건너갈 생각조차 안 하죠. 별것도 아닌데.”
내가 못나 보일 때는 어떡하죠.
“‘아유, 니가 그렇지 뭘’ 그러고 쓴 커피 마시면 되지 뭘 어떡해요.(웃음)”
드라마에서 악역도 잘하십니다. 동네의 정말 편한 아저씨와 비열한 악인, 너무 극과 극이잖아요.
“‘악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예술의 마지막 창조자는 ‘나’거든요. 관람이나 감상을 통해 예술 행위에 참여하는 건데, 어떤 연기자가 내 고정관념을 방해한다면 인상적일 수밖에요. 허를 찌른 달까. 그래서 내게 악역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요.(웃음)”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는 2016년 무렵의 드로잉 ‘기도’.
솔직히 연기 연습은 안 하실 것 같아요.
“내가 후배들한테 그래요. ‘라디오 DJ는 연기자야’. 라디오 DJ가 뉴스 앵커처럼 사실을 전달하는 데만 급급하면 소리에 의존하는 라디오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건조하게 들릴 거예요. 라디오 DJ가 멘트에 희로애락을 담아내려면 기본적으로 연기가 돼야 해요. 이미자씨의 ‘동백 아가씨’를 소개할 때와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소개할 때 똑같은 톤이면 안 되거든요.”
라디오 DJ의 역할은 뭘까요.
“그 시간에 거기 있어야 되는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들한테 그렇게 익숙해지려면 오래 걸려요. 그렇기 때문에 라디오 DJ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인기인이나 누가 오면 그 익숙함이 빨라질까?”
오프닝 멘트는 뭘로 쓰나요.
“(휴대폰을 쥐며) 이걸로 하죠. 원고 송고하기도 좋아요. 저는 또 자전거를 타야 되기 때문에 무거운 폰은 싫고. 그래서 손안에 들어오는 조그만 폰으로 써요.” (그가 보여주는 휴대폰 메모장에는 ‘개인 비서’ ‘그 주 아침 인사’ ‘아침창’ ‘6시 저녁 바람’ 등 여러 개 폴더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희망’이라는 그림이 자꾸 떠올라요. 중장년 세대 대부분이 바라는 것도 희망이죠.
“HOPE는, 희망은 안 보인다는 게 주제인데, 지금 바로 앞에 있는데 멀리서 찾으려니까 안 보이죠. 그 그림도 멀리서 보면 흑과 백뿐이에요.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다른 색깔의 얇은 붓질이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올해 95세신데, 70대 아들은 노래할 때마다 어머니가 공연장에 와서 내 노래를 들을 때와 아닐 때가 정말 다르거든요. 작년에 낙상을 하셔서 정신없이 지나가느라 봄꽃을 못 보여드렸어요. 그래서 올해는 봄꽃을 꼭 보여줘야지, 엄마 아이스크림 사줘야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결심해요.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희망은 그런 거예요. 손에 쥐어지고 눈에 들어오고 그러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