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변호사의 ‘죄와 벌’] 장제원 전 의원 부고를 듣고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50년 넘게 복역한 뒤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브룩스 하틀렌(제임스 휘트모어).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4/19/f48a025c-f144-476a-ad44-974e2bef93a1.jpg)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50년 넘게 복역한 뒤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브룩스 하틀렌(제임스 휘트모어). [중앙포토]
장 전 의원은 내가 일면식도 없고 특별히 호감을 가졌던 정치인도 아니다. 그런데도 만우절 내내 유쾌하지 않은 거짓말에 속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해졌다. 왜 이렇게 우울할까 유심히 마음을 살펴보니 그 우울함에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여러 겹의 감정들의 층위가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생무상과 허무함이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당선인 비서실장을 맡았고 정권 전반기까지 이른바 ‘윤핵관’으로 불리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런데 불과 3년 사이에 원치 않은 불출마 선언으로 의원직을 포기했고 성폭력 피의자가 되어 경찰에 불려 다니는 처지가 되었으며, 이제는 목숨마저 잃었다. 그 사이 자신이 당선에 공헌했던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하는 바람에 탄핵되고 내란죄로 기소되어 정권이 통째로 붕괴되었다. 추측일 뿐이지만,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데는 성폭력 혐의 외에도 이러한 과정에서 권력무상, 인생무상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도 같다. 권력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왜 그다지도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상대를 인간으로 봐주기조차 싫다는 듯 혐오하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일까.
그다음은 피해자가 받을 법한 정신적 충격에 대한 우려가 떠오른다. 정확한 사연과 내막은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겠지만 유사 사건들에 비추어 지난 10년간 여러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상대가 유명한 정치인인 만큼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로 큰 스트레스였을 터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 전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으니 그로 인해 또 다른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장 전 의원의 가족들이 받았을 충격과 심적 고통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갈수록 생명의 가치가 떨어지고 죽음이 쉬워진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도 우울감을 더한다. ‘한 생명의 무게는 전 지구보다 무겁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이제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한 해 약 1만4000명이 자살을 한다. 우리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에서 20여 년째 부동의 1위이다. 과거(가령 2008년 탤런트 최진실씨가 사망했을 때 얼마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던가)에 비하면 유명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에 대중들도 둔감해진 것 같다. 과거에는 가족애나 종교적 신념이 수문장처럼 자살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삶을 향해 돌려세우곤 했으나 이제 가족이 해체되고 종교도 약해지고 남의 인생에 조언하는 것이 죄악시된 사회에서는 그런 수문장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죽음을 택하려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신 있게 강변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갈수록 생명의 가치 가벼워져 우울
![4일 열린 고 장제원 전 의원 발인식.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4/19/2dfb150a-e279-414b-8e6c-b6e6e6ee1709.jpg)
4일 열린 고 장제원 전 의원 발인식. [연합뉴스]
장 전 의원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법적 책임을 앞두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두고 책임을 지지 않고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죽음으로써 어느 정도 책임을 졌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고인이 유서에 자신의 죽음 취지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면 이중 어느 쪽인지가 보다 분명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해석이 분분하게 된다. 죄와 벌은 죄인의 생과 사보다도 항상 무거운 것일까.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벼운 것인가, 아니면 죽음이 무겁고 삶이 가벼운 것인가. 그 해석은 이러한 죄와 벌, 생과 사에 대한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판사와 변호사로서의 경험상 이들이 단지 감옥에 가기 싫어서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유죄 판결로 실형을 받으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해고될 것이고 사업을 하던 사람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업이 망가진다. 가정이 깨어지는 일도 적지 않고 부부 관계에서는 실형을 받는 일은 이혼사유가 되기도 한다. 출소하면 사회적 명예도, 관계도 깨어지고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 외면한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처럼 수많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낙차가 말도 못하게 심하다. 더 큰 문제는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이 꺾이는 것이다. 든든한 가족이 있거나 먹고 살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모아놓은 재산이 많거나 나이가 아주 젊거나 하면 재기를 꿈꿀 수 있겠지만 이런 조건을 가진 운 좋은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법이 정한 형벌이 끝나더라도 사회적으로 재기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에 이들은 형기가 끝나도 사실상 계속 형벌을 받는 상태가 된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는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50년 동안 감옥에서 수감자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비둘기를 키우는 나름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자기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느끼며 모범수로 살아간다. 그러다 별안간 가석방이 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당황하며 감옥에 더 오래 남아있기 위해서 일부러 칼부림을 일으키는 척을 해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출소하고 만다. 출소 이후에도 어느 마트에서 손님들이 산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 소변을 보러 갈 때도 수감 중일 때처럼 허락을 받으려 할 정도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며 홀로 쓸쓸히 지내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죄지은 자 죽음, 도피인가 죗값인가
즉, 무거운 법적 책임을 앞둔 이들이 죽음을 떠올릴 때, 그들은 단순히 형벌의 고통을 회피하려고 죽음을 택하기보다 형벌 이후의 삶에 대한 절망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상 형벌이 끝없이 이어져 도저히 재기를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너는 왜 살아서 계속 벌 받고 책임을 다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누가 죄를 지으래”라며 비판하는 정의관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없어 공허해 보인다. 죄인은 죽음으로도 죄를 씻지 못하고 벌을 다 받지 못하는 것인가. 물론 죄인이 죽었다고 피해자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도, 죗값을 치렀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판단은 최종적으로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회구성원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의뢰인이 억울하다고 말할수록 힘이 난다. 그래서 무죄 변론을 해야 하는 사건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의뢰인이 사실은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는데 그렇게 고백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면목이 없어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는 남기고 싶어서 그럴 때도 적지 않다. 그런 경우에 의뢰인의 뜻을 대변해주어야 하는 변호사가 자백을 강요할 수도 없다.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서 계속 부인하다가 결국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알려줄 뿐, 최종 선택은 오롯이 의뢰인의 몫이다.
그럼에도 “변호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내 입에서는 대답 대신 나도 모르게 한숨만 나온다. 당장 매우 나쁜 상황이 초래되는 길과 당장은 체면을 덜 상하지만 나중에 훨씬 더 나쁜 상황이 초래되는 길 사이에서 어느 쪽 길이 더 나은가를 저울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완전히 남의 일 같지 않아서 한숨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살면 살수록 욕될 만한 일이 늘어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그럭저럭 욕되게 살다가 삶을 마칠 것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