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상트페트르부르크에 있는 현대차 러시아 공장의 러시아 업체 매각 전 모습. 뉴시스
이승조 현대차 재경본부장(부사장)은 지난달 24일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현재 러시아 시장에서 회사 차원의 영업은 없다”고 했다.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종전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가 풀리기 전까지는 재진출을 공식 선언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해석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현대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2023년 12월 러시아 자동차그룹 AGR 모회사 아트파이낸스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매각했다. 전쟁 전인 2021년 한 해에만 23만3804대를 생산·판매해 전진 기지로 쓰였지만, 경제 제재로 자금·부품 조달이 막히면서다. 당시 공장 매각 대금은 1만 루블(당시 약 14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2년 내인 올해 12월까지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항을 넣었는데 기한이 다가오면서 이를 행사할지 검토 중이다. 또 기아는 2030년 판매 목표량(419만대)에 러시아(5만대)를 포함했다. 모두 재진출을 염두에 둔 조치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자문위원은 “트럼프 관세로 미국 수출이 위축될 수 있는 상황에서 수출처 다변화를 위해 러시아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협회(KAMA)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 자동차 판매량은 183만3852대로 전년대비 39.2% 증가하는 등 성장세다.

김영옥 기자
재진출하더라도 전쟁 기간 점유율을 확 늘린 중국 자동차업체와 경쟁해야 한다.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전쟁 전인 2021년 러시아에서 4만2090대를 판매했던 중국 체리자동차는 지난해 31만1719대를 판매해 2위 브랜드를 꿰찼다. 같은 기간 GWM(3만6257→22만1675대, 3위), 지리자동차(3만3549→19만8781대, 4위), 창안자동차(3922→10만4141대, 5위) 등 중국 자동차기업의 러시아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현대차·기아의 러시아 판매량은 36만6454→3만2614대로 급감했다.
국내 항공업계 역시 종전에 기대감을 걸고 있지만 불안감도 적잖다. 국내 항공사들은 현재 제3자 제재를 우려해 러시아 남쪽으로 우회한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이 조치가 해제되면 유럽행 노선의 비행 시간과 연간 수백억 원 규모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다만 항공업계 관계자는 “승객·화물을 운송하는 항공기 특성상 종전과 그에 따른 사후 처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전까지는 영공 재사용, 러시아 취항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2022년 10월 촬영된 삼성전자의 러시아 칼루가 공장 전경. 현재는 러시아 전자부품업체 '그래비톤'에 임대돼 있다. 중앙포토
LG전자는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주 세탁기 및 냉장고 공장 일부를 가동했다. 전쟁 발발 이후 노후화 우려가 있는 생산설비를 재가동해 본격적인 생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다. 삼성전자도 TV, 냉장고, 세탁기 등을 생산하는 러시아 칼루가 공장 재가동 등을 검토 중이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1월부터 러시아에서 마케팅 활동도 재개했다.
다만 가전업계도 화웨이, 샤오미, 레노버 등 중국 업체에 시장 점유율을 뺏긴 상황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통상연구원장은 “재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은 중국 업체와 저가 경쟁을 해야 하기에 출혈이 클 수 있다”며 “다만 러시아 소비시장 추이에 따라 고급제품 위주로 승부를 걸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