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파워' 창시한 조지프 나이 별세…트럼프 파워, 역풍 예고

국제정치에서 군사력 등 '하드 파워'와 구별되는 '소프트 파워' 개념을 정립한 미국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지난 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88세.

 
고인은 프린스턴대 로버트 케오한 교수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론'을 만들었다. 국가 외에도 기업 등 다양한 주체들 사이에 복잡하게 형성된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 정세가 돌아간다는 '복합상호의존' 개념이 담긴 이론이었다. 그는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긴밀해져서 군사력이 더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고도 했다.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6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2011년 1월 13일 인도 뉴델리 외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모습. AFP=연합뉴스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6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2011년 1월 13일 인도 뉴델리 외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모습. AFP=연합뉴스

 
한 국가가 문화적 매력 등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소프트 파워(연성 권력)'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도 그였다. 하드 파워(경성 권력)가 군사력 등을 통해 상대를 위협해 행동을 강제하는 능력이지만, 소프트 파워는 상대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끔 하는 힘이다. 교육·학문·언어·예술 등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그는 한국이 활기찬 민주주의 정치, 코로나19 대응, 대중문화 성공 등으로 획득한 소프트파워를 높이 평가했다. 

뉴저지에서 태어난 그는 프린스턴대, 영국 옥스퍼드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4년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다. 국제정치학계에 60년간 몸담았던 그는 학계와 현실 정치를 오가며 양쪽에 모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동아태 선임 보좌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국제관계에 대해 이론적 사고를 하면서 이를 정책으로 전환했던 완벽한 학자"라고 말했다.  

나이는 각국 지도자급 인사들이 거쳐 '지도자의 컨베이어 벨트'로 불리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을 약 10년간 지냈다. 주중대사를 지낸 니컬러스 번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수많은 사람이 나이를 없어서는 안 될 멘토로 여겼다"면서 "케네디스쿨과 우리 삶에서 그는 거인이었다"며 고인을 기렸다. 


1997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2003년 여성 리더십 포럼에 참여한 나이 교수. 2003년 공공 서비스 포럼에 참석한 나이 교수. 1980년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 하버드대 홈페이지

1997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2003년 여성 리더십 포럼에 참여한 나이 교수. 2003년 공공 서비스 포럼에 참석한 나이 교수. 1980년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 하버드대 홈페이지

 
제러미 와인스타인 현 학장은 나이를 "독보적인 학자이자 비전 있는 학장, 헌신적인 멘토"라고 묘사했다. 또 "글로벌 정치가 전례 없는 변화를 겪은 동안, 나이는 우리가 현대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라며 "그의 지적 기여를 짧은 글에 담는 건 불가능하다"고 애도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4월 28일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정책연설을 한 뒤 조지프 나이 석좌교수와 대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강정현 기자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4월 28일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정책연설을 한 뒤 조지프 나이 석좌교수와 대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강정현 기자

 
두 차례 미국 행정부에서 일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안보원조·과학기술 담당 부차관보와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산하 핵무기비확산 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빌 클린턴 1기 행정부 때는 다시 정부 일을 맡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 위원장에 이어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그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에 미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른바 '나이 이니셔티브'다. 한·미동맹 등 미국의 동맹을 중시했던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정책이다. 그는 지난해 2월 미국외교협회(CFR) 대담에서 "우리가 억지력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우리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중국에 러시아와 북한이 있다면 미국은 유럽과 호주·일본·한국이라는 동맹이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토니 블링컨은 FT에 "미국에 그만큼 기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고인을 기렸다. 랜달 슈라이버 전 미 국방부 동아태 차관보(현 프로젝트 2049 연구소 소장) 역시 "미국 국가 안보에 수많은 공헌을 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조지프 나이(가운데)가 2011년 1월 13일 인도 뉴델리에서 회의에 참석한 모습. AFP=연합뉴스

조지프 나이(가운데)가 2011년 1월 13일 인도 뉴델리에서 회의에 참석한 모습. AFP=연합뉴스

 
나이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성노예(위안부)에 대한 사과를 담은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것은 "자학적 행위"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심포지엄에서 "고노 담화를 철회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중국 등) 이웃 국가들에 (일본 군국주의가 강했던) 1930년대를 떠오르게 한다"며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주장은 일본의 발에 총을 쏘는 격"이라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학장을 지낸 조지프 나이. FT는 "나이 교수와 함께 지난달 별세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의 노력 덕분에 미국은 적지 않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면서 두 거목의 별세는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중앙포토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학장을 지낸 조지프 나이. FT는 "나이 교수와 함께 지난달 별세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의 노력 덕분에 미국은 적지 않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면서 두 거목의 별세는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중앙포토

 
고령에도 왕성히 활동해온 그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소프트 파워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나이는 최근 FT 기고문에서 "트럼프는 뉴욕 부동산 업계에서 쌓은 경력 때문에 권력을 강압과 거래에만 국한하는 단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일갈했다. 나이는 "진정한 현실주의는 자유주의적 가치나 소프트 파워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서 "트럼프처럼 극단적인 자기애주의자는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아니며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향후 4년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짚었다.

지난달 그는 케네디스쿨의 정책 논평 팟캐스트에 출연해 트럼프의 발언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이는 "(트럼프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말이 나토 동맹국인 덴마크에서 그린란드를 빼앗겠다는 것이었다"며 "파나마 운하를 되찾겠다고 해 라틴 아메리카의 온갖 의구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미국을 외톨이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월엔 하버드대 등 트럼프의 대학 공격이 결국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이는 "추가 한 쪽으로 상당히 기울었지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여전히 (대학 교육이란) 사명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예가인 몰리 하딩과 결혼해 아들 셋과 손주 9명을 두며 63년간 해로했다. 보스턴글로브에 따르면 아내는 지난해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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