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첫 고객엔 안 팔아"…루이비통 잡은 '버킨 리스트'

명품제국 루이비통 넘어선 ‘뚝심의 브랜드’ 전략

경제+
“우리는 사치품(luxury)을 파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품질을 추구할 뿐이다.” 설립자 티에리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이자, 브랜드의 대표 상품 ‘버킨백’을 탄생시킨 장 루이 뒤마의 말이 결국 통한 걸까. 가족 기업의 명맥을 이으며 188년간 단일 브랜드를 지켜온 에르메스가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전 세계 명품 기업 1위에 올랐다. 이날 프랑스 증시(CAC40) 종가 기준 에르메스의 시가총액(2486억1600만 유로)이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시총(2443억9400만 유로)을 넘어선 것이다. 26년간 명품 카테고리 1위를 지켜온 LVMH는 에르메스에 왕좌를 내줬다. 세계 명품 시장이 위축된 요즘 어떻게 ‘조용한 뒤집기’에 성공했을까.
◆‘명품 제국’을 이긴 외골수=지난해 세계 개인 명품 시장 규모가 글로벌 금융위기(2008~2009년) 이후 처음으로 역성장(-2%)하는 등 글로벌 명품업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7.6% 성장하는 등 나홀로 실적 성장세를 유지 중이다.

수많은 명품 브랜드가 흥망성쇠를 겪으며 제조 공정, 경영 방식, 가격 정책에 변신을 거듭할 때도 에르메스는 기존 방식을 고수했다. 이 고집이 지금의 에르메스를 만들었다. 에르메스는 현재 프랑스에만 60여 개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가죽 부문 장인만 7000여명, 실크 프린팅 등 다른 분야의 장인을 합치면 1만 명이 넘는다. 레이저 재단 기계 등 첨단 장비를 활용해 공정을 분업화하고 생산 효율을 높인 다른 명품 브랜드와 달리, 에르메스에서는 재료를 다듬는 일부터 마무리 작업까지 장인 한 사람이 모두 전담한다. 버킨백 1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48시간, 스카프의 전체 디자인을 채색하는 데는 최대 700시간이 걸린다. 에르메스 제품의 희소성이 높아진 배경이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에르메스는 재작년까지 연간 1회 가격 인상 기조를 유지하는 등 다른 브랜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을 자주 올리지 않는 편이다. 인건비 상승, 환율 등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생산 비용에 입각해 가격을 정한다는 원칙을 지킨 것. 과거 한승헌 에르메스코리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23년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에르메스는 원가에 연동되는 가격 정책을 쓴다. 물건이 잘 팔린다는 이유로 가격을 올리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말했다.

또한 에르메스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의 구매 이력이 있어야 1개당 2000만원이 넘는 버킨백 구매 대기자에 명단을 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에르메스는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반(反)독점 집단소송에 휘말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에르메스가 브랜드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충성 고객에게 더 저렴한 제품을 판매하는 방법”이라며 “구찌 등 다른 브랜드가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휘청이는 LVMH=LVMH는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공격적인 인수합병(M&A) 전략으로 26년간 명품 기업 시총 1위 타이틀을 지켜왔다. 팬데믹 기간이던 2021년, 중국 수요가 급증하자 유럽 상장기업 전체 중 몸값이 가장 높은 회사가 됐고 2023년에는 시총이 4948억유로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대 명품 시장인 중국 내 매출액이 지난해 감소세에 접어들었고, 북미 매출을 늘리기 위해 마케팅을 확대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LVMH는 루이비통, 디올, 펜디 등 패션 브랜드 외에 주얼리(티파니앤코 등), 시계(태그 호이어 등), 주류(모엣&샹동, 헤네시 등), 뷰티(베네피트, 메이크업포에버 등) 부문에서 총 80여 개 브랜드를 갖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 연구원은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LVMH의 브랜드 구성은 팬데믹 직후 같은 소비 급증 시점에는 매출을 키우기 쉽지만 소비 둔화 국면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명품 업계 전반이 침체된 상황이 LVMH에는 M&A 할 기회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81년 프랑스의 명품 디올을 단돈 1프랑에 인수했던 아르노 LVMH 회장은 펜디, DKNY, 불가리, 로에베, 티파니앤코, 에트로 등 새로운 브랜드를 적절한 타이밍에 꾸준히 수집했다. 영국의 패션 전문 매체 더비즈니스오브패션(BoF)은 “아르노 회장은 현재 약해진 시장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LVMH의 주가 하락이 아르노 회장의 순자산에는 부정적이지만, 산업이 어려울 때 M&A 기회는 생긴다”라고 말했다.

◆끝없는 불황, 복병은 관세=끝 모를 불황은 명품업계 전반을 긴장시키고 있다. 글로벌 투자회사들은 2000년대 이후 명품 시장이 최장기 침체를 맞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은 명품업계의 올해 매출이 2%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명품 브랜드의 이익이 연간 4000억 달러어치씩 줄어들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도 나온다.

명품 시장에 더 큰 위협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던진 관세 폭탄이다. 대다수 명품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산되고 고급 시계는 스위스에서 생산된다. 명품은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적게 줄어드는 ‘비탄력적 상품’이기 때문에 관세의 대부분은 소비자 가격에 반영될 수 있다. LVMH는 지난 1분기 실적발표에서 “향후 관세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가격 인상을 고려할 것이며 마케팅 비용도 조정할 여지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전의 국내 럭셔리 시장=냉기가 도는 글로벌 시장과 다르게 국내 명품 시장은 아직 공고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샤넬의 매출(1조8445억원)은 전년 대비 8.3%, 루이비통(1조7484억원)은 5.9% 늘었다. 특히 에르메스(9643억원) 매출은 21%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더 크게 뛰었다. 지난해 루이비통(3891억원), 에르메스(2667억원)의 국내 영업이익은 각각 35.7%, 13% 늘었다.

국내 명품 수요는 여전하지만 분위기는 달라지는 추세다. 최상위 명품인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의 입지는 공고한 반면 다른 명품 브랜드는 성장세가 꺾였다. 지난해 크리스챤 디올의 국내 매출(9453억원)과 영업이익(2266억원)은 전년 대비 각각 9.6%, 27.4% 감소했다. 프라다는 지난해 한국에서 54억원의 적자를 봤고 페라가모의 매출(858억원)도 전년보다 12.7% 하락했다. 명품 시장이 성숙기에 들면서 소비자들이 더 희소한, 더 비싼 하이엔드급 명품으로 눈을 돌리고 있어서다.

명품 소비 ‘입문 단계’에서 주로 구매하는 가방 등 잡화 수요는 줄어드는 반면 주얼리·시계 소비가 늘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지난해 명품 주얼리·시계 매출이 전년보다 23.6% 증가해 명품 전체 매출 증가율(11.7%)을 웃돌았다. 국내 한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명품 보석과 시계에 웃돈을 붙여 재판매하는 중고 시장이 활성화하며 이런 제품을 자산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며 “대중적이지 않은 하이엔드 명품에 힘을 주면 백화점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고 고소득층의 소비를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