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 공장. 사진 LG에너지솔루션
미국 하원을 통과한 감세 법안에 전기차 보조금을 내년에 폐지하는 내용이 담기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 당시부터 우려했던 상황으로,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장기화 할 전망이다. 트럼프 시대에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비 전기차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중저가 제품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22일(현지시간) 미 하원을 통과한 감세 법안에는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 시점을 당초 2032년 말에서 내년 말로 조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2027년부터는 그만큼 소비자 부담이 커지면서 미국 내 전기차 보급 속도가 늦춰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업계에서는 ‘최악은 피했다’라는 반응이 나온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의 실적과 직결되는 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조항이다. 앞서 AMPC 폐지 시점이 2028년으로 대폭 당겨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지만, 하원 통과 법안에서는 기존 2032년 말에서 2031년 말로 1년 단축되는 데 그쳤다. 업계는 2028년 AMPC 폐지 시 국내 업계가 못 받게 되는 보조금이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1년 단축만으로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6일 인터배터리 유럽 삼성SDI 부스 앞에서 현지 참관객들이 전시회를 관람하는 모습. 사진 코엑스
법안에 담긴 또 하나의 변수는 ‘해외우려기관(FEOC)’ 규정이다. 앞으로는 배터리 제조사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AMPC에도 FEOC를 적용해 중국 업체로부터 부품과 광물 등을 직접 공급받는 경우 보조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배터리셀 업체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 이후 7500달러 보조금 폐지는 이미 예상했던 내용인데, 여기에 더해 공급망 탈중국화가 당면 과제가 됐다”라며 “흑연 음극재 등은 단기간에 탈중국이 쉽지 않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 중 음극재와 분리막은 중국 업체들의 글로벌 점유율이 9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음극재 출하량 상위 10곳은 모두 중국 업체였다. 국내 유일 음극재 양산 업체인 포스코퓨처엠은 기존 10위에서 11위로 밀려났다. 국내 소재 업체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장벽을 더 높이 세우면서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조지아주 잭슨 카운티 커머스시에 위치한 SK온 배터리 제조 공장 'SKBA'(SK Battery America) 전경. 사진 SK온
법안은 미 상원의 심의를 거쳐야 확정되지만 큰 틀에서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렇게 되면 국내 배터리 업계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캐즘 대안’ 1순위로 꼽히는 건 ESS 시장이다. 시장조사업체 블룸버그NEF(BNEF)에 따르면 ESS용 배터리 수요는 2020년 전기차 배터리의 15분의 1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엔 6분의 1까지 높아지며 빠르게 성장 중이다. SK온은 지난해 말 조직 개편으로 ESS사업부를 대표이사 직속으로 옮기며 역량 강화에 나섰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소비자들 사이 보조금 민감도가 커 미국 시장에서 캐즘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ESS 시장은 전망이 밝다”라며 “미국 내에서 ESS용 배터리를 제조할 수 있는 업체가 사실상 한국뿐이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이밖에 업계는 휴머노이드·도심항공교통(UAM) 등 미래 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두산밥캣과 함께 소형 건설장비용 배터리 개발에 나섰고, 삼성SDI는 현대차·기아와 로봇 전용 배터리를 개발 중이다.
중국과의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고전압 미드니켈·리튬인산철(LFP)·리튬망간리치(LMR) 같은 중저가 제품 개발에도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들어 중국과의 경쟁에서 성능보다는 가격이 더 중요해진 만큼, 중저가 제품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국내 배터리 업체들의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