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사진 NHN링크
7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서 깊은 벨라스코 극장 앞. 상기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서는 뉴요커 레인 앤더슨(65)은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하 ‘어쩌면~’, 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을 관람한 뒤 “환타스틱(Fantastic)!”을 연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와 함께 공연을 본 부인 킴벌리 앤더슨(64)은 ‘엄지 척’을 하며 “로봇이 인간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9년 전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출발한 창작 뮤지컬이 뮤지컬의 본고장이라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K-뮤지컬’의 저력을 입증하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 앞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뉴욕=김형구 특파원
‘뮤지컬의 아카데미’ 토니상 수상 기대감

김영옥 기자
서로 다른 성격 탓에 처음엔 삐걱거리던 둘은 올리버가 그리워하는 옛 주인 제임스가 살던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함께 반딧불이를 보고, 이제는 단종돼 버린 서로의 부품을 걱정해주면서 서로 어깨를 기댄다.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그 둘이 나누는 교감은 더없이 인간적이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헤어짐의 아픔까지.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 앞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을 관람한 뉴요커 레인 앤더슨과 킴벌리 앤더슨 부부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욕=김형구 특파원
커플 로봇 얘기에 관객들 웃고 울고
올리버 역을 맡은 배우 대런 크리스는 구형 로봇의 삐걱거리는 기계음과 ‘사랑에 빠진 소년’에게서 느껴질 법한 감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표현한다. 클레어 역을 맡은 중국계 미국 배우 헬렌 셴은 통통 튀는 활기찬 매력 뒤에 숨겨진 슬픔과 체념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이 만들어낸 하모니에 막간 휴식 없이 한달음에 이어진 2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 공연이 끝난 뒤 주요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길 브렌틀리 역의 데즈 듀런, 클레어 역의 헬렌 셴, 올리버 역의 대런 크리스, 제임스 역의 마커스 최. 뉴욕=김형구 특파원
벨라스코 극장에서 공연 중인 영어 버전 ‘Maybe Happy Ending’은 한국 버전과 큰 틀에서 비슷하나 구성과 무대연출에서 약간의 변주를 줬다. 2023년 ‘퍼레이드’로 토니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마이클 아덴이 영어 버전 연출을 맡으면서 생긴 변화다. 특히 가까운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디지털적 요소를 장면 곳곳에 삽입한 점이 눈에 띈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옛 주인과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는 회상 장면은 마치 SF 영화를 보는 듯한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디지털 숫자 전광판이 무대 한쪽에 설치돼 관객들이 공연 흐름을 놓치지 않게끔 돕는다.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 앞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의 여성 ‘헬퍼봇’ 클레어 역을 맡은 중국계 미국 배우 헬렌 셴이 팬에게 자신의 사인이 담긴 소책자를 건네고 있다. 뉴욕=김형구 특파원
1000석 꽉 채우며 ‘글로벌 관객몰이’
관객들 반응은 꽤 뜨겁다. 지난해 11월 1000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에서 오픈런으로 정식 개막한 뒤 현지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한 달 만인 12월부터 객석 점유율 꾸준히 90% 이상을 기록해 왔다. 지난달 토니상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뒤에는 ‘토니상 후보작 프리미엄’까지 붙어 빈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글로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 앞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을 관람한 존 밀러(오른쪽) 가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욕=김형구 특파원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존 밀러(52)는 중앙일보와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로봇 사이에서 꽃피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 가슴 뭉클한 뮤지컬 한 편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뮤지컬 애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뉴요커 줄리아 스콧은 “제가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스토리텔링과 감정 전달이 모두 완벽한 작품”이라며 “브로드웨이 대작들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