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해피엔딩’ 키운 이곳, 창작자들에 ‘실패할 시간’ 줬다

실패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조건 없이 지원한다.
 
지난 8일(현지시간) 토니상 6관왕(작품·각본·작사작곡·연출·남우주연·무대 디자인)을 휩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을 발굴한 우란문화재단의 모토다. 우란문화재단은 공연과 전시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비영리 문화재단으로, 한국 뮤지컬계에 귀한 존재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올리버(대런 크리스)와 클레어(헬렌 J.셴)는 사람과 흡사한 로봇, '헬퍼봇'이다. 구형 로봇으로서 외롭게 살아가던 그들은 반딧불을 찾기 위한 여행을 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된다. 사진 polk and co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올리버(대런 크리스)와 클레어(헬렌 J.셴)는 사람과 흡사한 로봇, '헬퍼봇'이다. 구형 로봇으로서 외롭게 살아가던 그들은 반딧불을 찾기 위한 여행을 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된다. 사진 polk and co

‘우란문화재단’이라는 이름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모친이자 워커힐 미술관을 설립한 우란(友蘭) 박계희 여사의 뜻을 이어받고자 박 여사의 호를 차용해 지었다. SK행복나눔재단의 문화사업팀에서 독립하여 2014년 설립된 재단은 올해 11주년을 맞았다.

2024년 가을 브로드웨이 데뷔를 앞두고 공연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속 한 장면. 사진 CJ ENM

2024년 가을 브로드웨이 데뷔를 앞두고 공연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속 한 장면. 사진 CJ ENM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사업을 통해 개발이 시작됐다. 2015년 재단 내부에서 리딩 공연(대본만 읽는 공연)과 트라이아웃 공연(본 공연 전 시험 공연)을 하고, 2016년 뉴욕 리딩 공연을 거쳤다. 초연은 2016년 12월 한국 DCF 대명문화광장에서 공개됐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로봇들의 관계에 빗대어 표현한 이 작품은 한국에서만 다섯 차례 공연될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에 이어 토니상 6관왕 수상까지 ‘국산 창작 뮤지컬’로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의 첫 창작 뮤지컬이기도 하다. 팬들에게 ‘윌휴 콤비’로 불리는 둘은 뉴욕대 재학시절 만나 영화 원작의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로 협업을 시작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제작한 윌 애런슨과 박천휴. 사진 polk and co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제작한 윌 애런슨과 박천휴. 사진 polk and co

우란문화재단은 2014년 콘텐트 개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시야 스튜디오’(SEEYA STUDIO)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을 만났다. 시야 스튜디오는 창작자(작가·작곡가)에게 필요한 전 과정을 지원하여, 작품을 개발해 무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평균 2년 정도의 시간이 들며, ‘어쩌면 해피엔딩’의 무대화엔 약 1년이 걸렸다. 당시 우란문화재단 소속 프로듀서로 참여한 김유철 라이브러리컴퍼니 본부장에 따르면 재단의 모토 중 하나는 “실패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창작자는 재단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밀착 지원을 받는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영어 버전으로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도 이 소통 과정에서 나왔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재단은 창작자에게 월급 형식으로 비용을 지급한다. 창작자들의 경력에 따라 편차는 있으나, 무경력자더라도 최저시급은 보장받았다. ‘생계를 위한 일을 따로 구하지 말고, 작품에 매진하라’는 의미에서다. 연출과 배우 섭외, 내부 리딩 등에 드는 비용 또한 지원된다. 심리상담과 멘토링도 이뤄졌다.

“조건 없이 지원한다”는 모토에 따라 IP(지식재산권)도 온전히 창작자가 갖게된다. 우란문화재단 관계자는 “비영리 문화재단인 우란문화재단은 문화예술 생태계의 구조적 다양성과 자율성을 지지한다”며 “상업적 요구에 쉽게 휘둘릴 수 있는 창작 환경 속에서, 이러한 원칙은 창작자의 권리와 예술의 본질을 지켜내는 균형장치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창작자 중심의 지원체계는 미국 뮤지컬 시장의 개발방식을 차용한 결과다. 김 본부장은 “미국에선 브로드웨이에 오르는 뮤지컬 작품들도 비영리 단체에서의 개발 과정 등을 거쳐 상업 프로덕션으로 가는 단계를 밟는다”며 “국내에도 이러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시인 백석의 시와 사랑을 무대로 끌어와 호평을 받았다. '나나흰'의 극본을 집필하고 가사와 연출까지 담당한 박해림 작가는 '나나흰'으로 2017년 제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서 극본상을 시상했고, 2019년 제13회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극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시인 백석의 시와 사랑을 무대로 끌어와 호평을 받았다. '나나흰'의 극본을 집필하고 가사와 연출까지 담당한 박해림 작가는 '나나흰'으로 2017년 제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서 극본상을 시상했고, 2019년 제13회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극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우란문화재단은 ‘어쩌면 해피엔딩’ 외에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나흰, 2016), ‘레드북’(2018)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국내 소극장 뮤지컬 발굴에 꾸준히 힘써왔다. ‘나나흰’의 경우 이미 만들어진 대본과 음악을 보고 우란문화재단이 이어서 개발을 진행한 작품이며, ‘레드북’은 우란문화재단과 함께 개발한 대본이 창작산실 공모 당선 후 제작사와 연결된 경우다. 

우란문화재단 관계자는 9일 중앙일보에 “첫 트라이아웃 공연으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이 토니상에 후보로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단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우리가 믿어 온 창작 생태계의 방향이 의미 있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우란문화재단은 올해 하반기 제작공연으로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연극 ‘봄밤’(9월 16일 개막)과 ‘썬더(가제)’(10월 28일 개막) 공개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