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중 잃은 팔·다리보다 더 아픈 건"...美참전용사의 한마디 [안혜리의 인생]

사진작가 현효제 인터뷰

국내외 참전용사를 기록하는 현효제 작가를 지난 11일 한국전쟁 75주년 회고전이 열리는 에스제이쿤스트할레에서 만났다. 그가 찍은 사진뿐 아니라 그가 모은 한국전 관련 희귀 자료를 함께 보여주는 이 전시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진영 기자

국내외 참전용사를 기록하는 현효제 작가를 지난 11일 한국전쟁 75주년 회고전이 열리는 에스제이쿤스트할레에서 만났다. 그가 찍은 사진뿐 아니라 그가 모은 한국전 관련 희귀 자료를 함께 보여주는 이 전시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진영 기자

거창한 인생 계획은커녕 아무 생각 없는 인문학부 전공 대학생이 있었다. 또 아무 생각 없이 육군 보병으로 군대에 갔다가 지게차 특기병이 됐다. 컴맹에 가까웠는데, 4년제 다닌다는 이유로 당시(2001) 군이 도입한 CBT(컴퓨터 기반 교육훈련) 사업 담당으로 선발돼 지게차 등 다양한 장비와 무기 훈련에 쓸 3D 애니메이션 만드는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했다. 재밌었다. 난생처음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웹 디자이너 돼야지. "

제대 후 복학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산업공학과로 전과하려 미친 듯이 학점을 땄다. 교수 5명의 최종 승인만 남은 상황. 한 교수가 말했다. "왜 기어들어 오려고 그래? 귀찮게. " 실망스러웠다. "이 학과 미래가 없네. " 

미국은 민관 모두 경의 표하는데
정부 할 일 자비로 해도 모욕만
"자유 가진 자는 자유 지킬 의무"
'멸종위기 종족' 기록하는 이유
 
그렇게 유학 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AU)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다 한 대가와의 이메일을 통해 사명과도 같은 천직, 사진을 만났다. 어릴 적엔 사진 전공한 엄마의 피사체가 되기조차 싫었지만 결국 사진작가로 거듭나 전 세계 한국 전쟁 참전 용사를 찍는 라미 현(46·현효제)의 인생 전반부 이야기다.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선 여러 좋은 스승을 만나 사진에 빠질 수 있었다. 귀국 후엔 인생 방향을 바꿔준 군과 운명처럼 다시 연결돼 생업까지 접고 국내외 한국전 참전용사를 직접 찾아 기록하는 '프로젝트 솔저'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그 까다로운 공항 출입국심사대조차 한국전참전용사협회(KWVA) 공식 레터를 보면 화물을 선뜻 날라줬고, 교통경찰은 속도위반 딱지 대신 경의를 표했다. 누구냐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지만 중요했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어쩌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자비로 하는데도 고마움 표시 대신 그의 사진에 부처 이름 달아 보도자료 뿌리며 저작권 인정조차 안 했다. 세계적 작가 타이틀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미 참전용사 제롬 골더(92·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시에 맞춰 방한했다. 지난 10일 75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한국 참전용사들과 만났다. [사진 프로젝트 솔저]

미 참전용사 제롬 골더(92·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시에 맞춰 방한했다. 지난 10일 75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한국 참전용사들과 만났다. [사진 프로젝트 솔저]

지난달 23일, 그리고 지난 11일 현 작가가 또 자비 6억원(후원 3억 포함) 들여 마련한 6·25 발발 75주년 기념 특별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가 열리는 서울 논현동 에스제이쿤스트할레에서 만나 왜 그토록 참전용사 촬영에 진심인지를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스승, 무모한 배움

사진 인생의 시작은 무모한 이메일 한 통이었다. 할리우드 영화 특수효과 라이팅으로 유명한 한 대가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처럼 되려면 뭘 하면 되느냐고. 답이 왔다. "넌 안돼(You can't). 빛을 볼 수 없으니까. " 두어 번 메일이 오간 후 이런 제안이 왔다. "사진을 찍으면 빛·구도·색을 배울 수 있어. 셋 다 하긴 어려우니 색을 빼. 흑백사진 10만장 찍은 다음 연락해. "

학교 갈 때, 밥 먹을 때, 그야말로 모든 걸 찍었다. 하루 수백장, 그렇게 1년에 13만장을 찍다 보니 비로소 이해가 갔다. 예민해진 눈으로 키운 관찰력이 잘 드러난 사진 몇장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빛을 보는 능력이 뭔지 알겠어요. " 답이 왔다. "당신 누구?" 어이없는 결말이지만 이를 계기로 사진과 사랑에 빠져 전공을 바꿨다. 

실무 중심 커리큘럼으로 유명한 AAU답게 업계 대가 교수를 여럿 만났다. 상원의원이나 할리우드 셀럽 등 피사체마다 어떤 복장으로 뭘 선물하고, 심지어 악수나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시시콜콜한 노하우를 다 가르쳐준 마이클 어드만이 기억에 남는다. 1년에 나이키 등 한두 작업만 하고 나머지 10개월은 영감 얻는 시간으로 채우는 제임스 우드는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고객 입맛 맞춰 돈 버는 사진업자가 아니라 사진작가(포토그래퍼)가 되려면 스스로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미국 유학 시절인 지난 2008년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 여행에서 찍은 사진. 김중만 작가의 찬사를 받으며 큰 꺠달음을 얻었다. [사진 현효제]

미국 유학 시절인 지난 2008년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 여행에서 찍은 사진. 김중만 작가의 찬사를 받으며 큰 꺠달음을 얻었다. [사진 현효제]

이 조언에 '내' 사진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어 있으면 빈 게 나온다, 삶이 들어가야 삶을 찍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졸업 후 김중만 작가(1954~2022)를 만난 뒤였다. 장거리 연애하던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 이별 통보를 받고 프러포즈하려던 파리에 충동적으로 간 적 있다. 그때 찍은 사진을 지인인 임기학 셰프에게 선물했는데, 그의 레스토랑에 온 김 작가가 이걸 보고 날 찾았다. "네가 파리를 제일 잘 아는 것 같아. 그립고 화나고 슬픈 감정이 정확히 담겼어. " '뭘 찍느냐'가 아니라 '뭘 느끼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2010년 귀국하자마자 우연히 맡은 카드업체 바른손 창립 40주년 기념 영상부터 한동일·신수정·이경숙·조재혁·김대진·손열음·조성진 등과 한 경기도 문화의전당 피아니스트 사진 작업, 서울대병원 외과 전공의 모집 홍보영상, 그리고 지금의 참전용사 작업까지 일관되게 이 깨달음을 녹였다. 수술이나 훈련 장면 대신 사람, 아니 삶을 중심에 뒀다. 
군인, 무모한 존경
군 복무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는데도, 군과 군인을 무시했다. 2014년 무렵 육군 1사단 홍보 영상을 맡아 이병부터 대령까지 60여 명을 인터뷰하면서 달라졌다. 당시 군 생활 28년 한 성우경 원사는 "부끄럽지 않은 군인인데, 아버지·남편으로선 부끄럽다"며 "나라와 부대가 늘 우선이라 못 간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며 눈물을 비쳤다. 나라 지키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희생하는데 단편적 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한 내가 부끄러웠다. 성 원사뿐 아니었다. 가족여행은 고사하고 아이 출산 못 지킨 이가 대부분이었다. 꼭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훌륭하다"고. 

하지만 이 영상은 공식적으론 폐기됐다. 앞서 서울대병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당 중령이 훈련 모습, 무기 하나 없이 왜 군인이 됐는지 말하는 인터뷰로 가득 찬 영상을 보고 화가 나 "당장 바꾸라"고 명령한 거다. 하지만 몇몇이 돌려보다 이듬해 ‘대한민국 국군은 당신을 지킵니다'라는 제목의 편집본을 만들어 국군 29초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내 작업도 군의 신뢰를 얻었다. 8·4 DMZ 지뢰도발 사건 당시 북한군 매설 지뢰에 다리를 잃은 하재헌 하사가 입원했을 때 의뢰받은 격려 영상 반응도 좋았다. 훗날 군 단체사진과 군 가족사진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6년 군복 전시회에 우연히 들른 미 참전용사 살 스칼라토를 찍을 떄 그의 자부심 어린 눈빛을 만나 현효제 작가의 인생이 바뀌었다. [사진 현효제]

지난 2016년 군복 전시회에 우연히 들른 미 참전용사 살 스칼라토를 찍을 떄 그의 자부심 어린 눈빛을 만나 현효제 작가의 인생이 바뀌었다. [사진 현효제]

50여개 부대를 다니며 찍은 군복 사진은 2016년 일산 킨텍스에서 전시했다. 박근혜 정부 말기 최순실 게이트 와중이라 군 후원은 언감생심 오히려 "군인 팔아먹지 마라"는 타박만 들었다. 한국군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산 쇼 참관차 방한한 미 해병대 참전용사 살바토레 스칼라토가 우연히 들렀길래 포토존에 세웠다. 참전용사는 처음 봤는데, 찍는 순간 눈에서 자부심 가득한 광채가 나왔다. 이제껏 한국군 3000명을 찍었지만 못 본 눈빛이었다. 궁금했다. 자기 나라 위해 싸운 것도 아닌데 저런 자부심이 어디서 나오나. 

마침 2017년 보훈처(보훈부)의 해외 참전용사 초청 소식을 듣고 당시 처장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첫마디가 "당신 뭐야, 처장한테 뭘 한 거야"였다. 한참 설명하니 담당 공무원을 바꿔줬다. 그는 "안 돼요" 소리만 하다 마지막에 "누구 빽으로 남의 밥상에 숟가락 얹는지 모르겠지만 행사 후 딱 20분 촬영하고 다신 연락하지 마라"며 끊었다. 그렇게 13개국 40여 명의 사진을 찍었다. 모두 같은 눈빛이었다. 의문은 더 쌓였다. 답을 찾아야 했다. 

자유, 무모한 도전

각 대사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개인정보라 안된다는 똑같은 답이었다. 영국 대사관만 이메일 하나를 알려줬다. 찾아가서 만난 첫 번째 참전용사 알렌 가이였다. "30분쯤 시간 된다"기에 무작정 런던 행 비행기를 탔다. 그의 집 버지니아워터로 가며 박대당할까 두려웠는데, 기우였다. 약속한 30분은 5시간이 됐다. 70년 가까이 흘러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청년의 "감사합니다(Thank you for your service)" 한마디에 그는 17세에 처음 부산항에 도착해 시체 썩는 냄새가 실려 오던 죽음의 바람 공포를 이겨내야 했던 고단한 군 복무를 다 보상받은 거 같다고 했다. 몇 개국 몇 명 참전, 몇 년 휴전, 인천 상륙, 장진호 전투 등 전쟁을 숫자와 지명으로만 배운 나로선 처음 듣는 놀라운 인생 이야기였다. 한 달 뒤 사진을 액자에 담아 다시 찾아 그 지역 참전용사 30여 명을 더 찍었다. 사연도, 사진 한 장에 눈물 흘리며 고마워하는 모습도 정말 감동적이었다.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영웅 윌리엄 웨버 대령.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2020년 촬영한 사진이다. 한국 정부는 이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했고, 이후 사용료도 내지 않았다. [사진 현효제]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영웅 윌리엄 웨버 대령.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2020년 촬영한 사진이다. 한국 정부는 이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했고, 이후 사용료도 내지 않았다. [사진 현효제]

전투 중 오른팔 잃고 후송 중 포탄 맞아 같은 날 오른 다리마저 잃고도 20년 넘게 더 복무한 미군 영웅 윌리엄 웨버(1928~2022) 대령은 말할 것도 없다. "빚진 걸 갚는 것"이란 내 말에 그는 "빚진 것 없다"며 "자유 가진 사람은 자유가 없거나 잃게 된 이들의 자유를 지켜줄 의무가 있고, 참전은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또 "한쪽 팔·다리 없는 것보다 한반도 분단이 더 가슴 아프다"며 "이제 너희가 북쪽에 자유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웨버처럼 한·미 양국에서 영웅 대접받은 이들뿐 아니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 가족과 멀어진 이들에게조차 한국전 참전은 자랑스런 과거였다. 이들은 스스로 "자유를 권리 아닌 의무 삼아 싸운 멸종 위기 종족"이라 입을 모았다. 

안혜리의 인생

 
매번 "마지막"이라 생각했지만, 2019년 아예 내 상업사진 스튜디오를 접고, 장비 팔고 빚 져가며 전 세계 참전용사를 찾는 건 자유를 위해 싸운 이 멸종 위기 종족을 더 많이 담고 싶어서다. 국내외 적잖은 후원자가 액자값이며 현지 숙박 등을 책임져준 덕분에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며 참전용사 2500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2022년 캠핑카 몰고 미 40개 주를 돌 땐 도착 당일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 서둘렀더라면, 눈물이 났다. 

한국전 발발 75주년이다. 더 늦기 전에 자유를 지킨 사람들 이야기를 더 많이 모아 이를 후대에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 생각 없이 살던 나의 첫 인생 계획이 부디 이뤄지길. 그리고 한국군 참전용사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부디 감사인사를 받기를.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