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현효제 인터뷰

국내외 참전용사를 기록하는 현효제 작가를 지난 11일 한국전쟁 75주년 회고전이 열리는 에스제이쿤스트할레에서 만났다. 그가 찍은 사진뿐 아니라 그가 모은 한국전 관련 희귀 자료를 함께 보여주는 이 전시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진영 기자
제대 후 복학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산업공학과로 전과하려 미친 듯이 학점을 땄다. 교수 5명의 최종 승인만 남은 상황. 한 교수가 말했다. "왜 기어들어 오려고 그래? 귀찮게. " 실망스러웠다. "이 학과 미래가 없네. "
미국은 민관 모두 경의 표하는데
정부 할 일 자비로 해도 모욕만
"자유 가진 자는 자유 지킬 의무"
'멸종위기 종족' 기록하는 이유
정부 할 일 자비로 해도 모욕만
"자유 가진 자는 자유 지킬 의무"
'멸종위기 종족' 기록하는 이유
그렇게 유학 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AU)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다 한 대가와의 이메일을 통해 사명과도 같은 천직, 사진을 만났다. 어릴 적엔 사진 전공한 엄마의 피사체가 되기조차 싫었지만 결국 사진작가로 거듭나 전 세계 한국 전쟁 참전 용사를 찍는 라미 현(46·현효제)의 인생 전반부 이야기다.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선 여러 좋은 스승을 만나 사진에 빠질 수 있었다. 귀국 후엔 인생 방향을 바꿔준 군과 운명처럼 다시 연결돼 생업까지 접고 국내외 한국전 참전용사를 직접 찾아 기록하는 '프로젝트 솔저'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그 까다로운 공항 출입국심사대조차 한국전참전용사협회(KWVA) 공식 레터를 보면 화물을 선뜻 날라줬고, 교통경찰은 속도위반 딱지 대신 경의를 표했다. 누구냐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지만 중요했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어쩌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자비로 하는데도 고마움 표시 대신 그의 사진에 부처 이름 달아 보도자료 뿌리며 저작권 인정조차 안 했다. 세계적 작가 타이틀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미 참전용사 제롬 골더(92·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시에 맞춰 방한했다. 지난 10일 75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한국 참전용사들과 만났다. [사진 프로젝트 솔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8/59a4d211-b6ab-4dde-a1be-ab3a1ab26b11.jpg)
미 참전용사 제롬 골더(92·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시에 맞춰 방한했다. 지난 10일 75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한국 참전용사들과 만났다. [사진 프로젝트 솔저]
스승, 무모한 배움
학교 갈 때, 밥 먹을 때, 그야말로 모든 걸 찍었다. 하루 수백장, 그렇게 1년에 13만장을 찍다 보니 비로소 이해가 갔다. 예민해진 눈으로 키운 관찰력이 잘 드러난 사진 몇장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빛을 보는 능력이 뭔지 알겠어요. " 답이 왔다. "당신 누구?" 어이없는 결말이지만 이를 계기로 사진과 사랑에 빠져 전공을 바꿨다.
실무 중심 커리큘럼으로 유명한 AAU답게 업계 대가 교수를 여럿 만났다. 상원의원이나 할리우드 셀럽 등 피사체마다 어떤 복장으로 뭘 선물하고, 심지어 악수나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시시콜콜한 노하우를 다 가르쳐준 마이클 어드만이 기억에 남는다. 1년에 나이키 등 한두 작업만 하고 나머지 10개월은 영감 얻는 시간으로 채우는 제임스 우드는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고객 입맛 맞춰 돈 버는 사진업자가 아니라 사진작가(포토그래퍼)가 되려면 스스로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미국 유학 시절인 지난 2008년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 여행에서 찍은 사진. 김중만 작가의 찬사를 받으며 큰 꺠달음을 얻었다. [사진 현효제]](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8/7f9144df-c62f-4e1d-9b88-3e71634398a0.jpg)
미국 유학 시절인 지난 2008년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 여행에서 찍은 사진. 김중만 작가의 찬사를 받으며 큰 꺠달음을 얻었다. [사진 현효제]
2010년 귀국하자마자 우연히 맡은 카드업체 바른손 창립 40주년 기념 영상부터 한동일·신수정·이경숙·조재혁·김대진·손열음·조성진 등과 한 경기도 문화의전당 피아니스트 사진 작업, 서울대병원 외과 전공의 모집 홍보영상, 그리고 지금의 참전용사 작업까지 일관되게 이 깨달음을 녹였다. 수술이나 훈련 장면 대신 사람, 아니 삶을 중심에 뒀다.
군인, 무모한 존경
군 복무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는데도, 군과 군인을 무시했다. 2014년 무렵 육군 1사단 홍보 영상을 맡아 이병부터 대령까지 60여 명을 인터뷰하면서 달라졌다. 당시 군 생활 28년 한 성우경 원사는 "부끄럽지 않은 군인인데, 아버지·남편으로선 부끄럽다"며 "나라와 부대가 늘 우선이라 못 간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며 눈물을 비쳤다. 나라 지키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희생하는데 단편적 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한 내가 부끄러웠다. 성 원사뿐 아니었다. 가족여행은 고사하고 아이 출산 못 지킨 이가 대부분이었다. 꼭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훌륭하다"고.
하지만 이 영상은 공식적으론 폐기됐다. 앞서 서울대병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당 중령이 훈련 모습, 무기 하나 없이 왜 군인이 됐는지 말하는 인터뷰로 가득 찬 영상을 보고 화가 나 "당장 바꾸라"고 명령한 거다. 하지만 몇몇이 돌려보다 이듬해 ‘대한민국 국군은 당신을 지킵니다'라는 제목의 편집본을 만들어 국군 29초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내 작업도 군의 신뢰를 얻었다. 8·4 DMZ 지뢰도발 사건 당시 북한군 매설 지뢰에 다리를 잃은 하재헌 하사가 입원했을 때 의뢰받은 격려 영상 반응도 좋았다. 훗날 군 단체사진과 군 가족사진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6년 군복 전시회에 우연히 들른 미 참전용사 살 스칼라토를 찍을 떄 그의 자부심 어린 눈빛을 만나 현효제 작가의 인생이 바뀌었다. [사진 현효제]](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8/aadf4a52-8653-45f8-b638-9bcac4e27d45.jpg)
지난 2016년 군복 전시회에 우연히 들른 미 참전용사 살 스칼라토를 찍을 떄 그의 자부심 어린 눈빛을 만나 현효제 작가의 인생이 바뀌었다. [사진 현효제]
마침 2017년 보훈처(보훈부)의 해외 참전용사 초청 소식을 듣고 당시 처장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첫마디가 "당신 뭐야, 처장한테 뭘 한 거야"였다. 한참 설명하니 담당 공무원을 바꿔줬다. 그는 "안 돼요" 소리만 하다 마지막에 "누구 빽으로 남의 밥상에 숟가락 얹는지 모르겠지만 행사 후 딱 20분 촬영하고 다신 연락하지 마라"며 끊었다. 그렇게 13개국 40여 명의 사진을 찍었다. 모두 같은 눈빛이었다. 의문은 더 쌓였다. 답을 찾아야 했다.
자유, 무모한 도전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영웅 윌리엄 웨버 대령.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2020년 촬영한 사진이다. 한국 정부는 이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했고, 이후 사용료도 내지 않았다. [사진 현효제]](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8/fa8eb377-d1c6-480a-885a-c055c2ef2a9a.jpg)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영웅 윌리엄 웨버 대령.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2020년 촬영한 사진이다. 한국 정부는 이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했고, 이후 사용료도 내지 않았다. [사진 현효제]
웨버처럼 한·미 양국에서 영웅 대접받은 이들뿐 아니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 가족과 멀어진 이들에게조차 한국전 참전은 자랑스런 과거였다. 이들은 스스로 "자유를 권리 아닌 의무 삼아 싸운 멸종 위기 종족"이라 입을 모았다.
매번 "마지막"이라 생각했지만, 2019년 아예 내 상업사진 스튜디오를 접고, 장비 팔고 빚 져가며 전 세계 참전용사를 찾는 건 자유를 위해 싸운 이 멸종 위기 종족을 더 많이 담고 싶어서다. 국내외 적잖은 후원자가 액자값이며 현지 숙박 등을 책임져준 덕분에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며 참전용사 2500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2022년 캠핑카 몰고 미 40개 주를 돌 땐 도착 당일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 서둘렀더라면, 눈물이 났다.
한국전 발발 75주년이다. 더 늦기 전에 자유를 지킨 사람들 이야기를 더 많이 모아 이를 후대에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 생각 없이 살던 나의 첫 인생 계획이 부디 이뤄지길. 그리고 한국군 참전용사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부디 감사인사를 받기를.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