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이형'이라 더 반가운 '장얼' 하세가와 요헤이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MBC '무한도전' 가요제는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예능을 넘어 음악계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걸맞게 가요제에 참가하는 뮤지션들은 이름만으로도 대중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설사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도 '무한도전'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제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그런 '무한도전 가요제'에 인디신을 씹어먹은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장기하와 얼굴들을 패러디한 무한도전이었기에 이들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고, 과연 이들이 무한도전을 만나 어떤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지 네티즌들의 기대감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에 걸맞듯 '장기하와 얼굴들'은 하하와 짝을 이뤄 음악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양평이형이 있었다.

YG엔터테인먼트 직원 앞에서 부끄러운 듯 "밥 먹으러 왔는데요,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웅얼거리는 그가 방송에 등장한 순간, 포털사이트에는 그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식판을 두드리며 홍대 앞 거리에서 "장기하와 얼굴들 멤버입니다"를 외친 양평이형은 스타가 되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불꽃이 터지는 기타를 들고 '자유로 가요제' 무대를 장악한 그의 모습은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의 매력을 알리는 정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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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 름 : 하세가와 요헤이(長谷川陽平)

생년월일 : 1971년 11월 4일

데 뷔 : 1995년 밴드 곱창전골

- 밴드

1995년 : '곱창전골'

1998~1999년 : '황신혜밴드'

2003~2008년 : '뜨거운 감자'

~2011년 : 김창완밴드

2010~현재 : '장기하와 얼굴들'

그외 델리스파이스, 산울림 등 다수 밴드에서 객원멤버로 참여

- 참여앨범

1998년 : 황신혜밴드 1집 '특별시 소년소녀', 2집 'Ver2.0 건전가요'

2001년 : 황보령 2집 '태양륜'

2003년 : 뜨거운 감자 2집 'New Turn'

2006년 : 뜨거운 감자 3집 '年記', 영화 '사생결단' OST

2008년 : 강산에밴드 8집 'Vol.7 - 물수건', 김창완밴드 EP 'The Happiest', 뜨거운 감자 4집 'The journey of cultivating a potato field'

2009년 : YB 8집 '공존', 김창완밴드 1집 'Bus', 다이나믹 듀오 5집 'Band Of Dynamic Brothers'

2011년 : 김창완밴드 EP 'Darn It', 미미시스터즈 1집 '미안하지만... 이건 전설이 될 거야', 장기하와 얼굴들 2집 '장기하와 얼굴들'

2013년 : 오니시 유카리 '직격! 한류 부인권 (直擊! 韓流 婦人拳)'

-안녕하세요. 디시인사이드입니다.

안녕하세요.

-디시는 아세요?

네. 일본의 2ch 같은 곳인가요?

-보통 그렇게 비교를 하시는데 시스템이 조금 달라요. (웃음)

장기하와 얼굴들 갤러리(이하 장얼갤)가 있다고 들었어요. 보기는 했어요. 장얼갤 갔어요.

-얼마 전 장얼갤에서 생일이라고 식판 선물했던데, 그래서 보신 건가요?

네. 장얼갤이라고 쓰여있어서 '이게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인가보다' 해서 한 번 봤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팬인데 어떤 얼굴인지, 분명 아는 사람들인데 누가 어떤 닉네임을 쓰는지모르겠어요.

-식판 보고 어땠어요?

'보내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은 했어요. 크게 예상까지는 안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요.

-혹시 식판 쓰셨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집에 계신데, 그걸로 차를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트위터에 사진 올렸어요. 차 포트랑 찻잔 놓고 마시고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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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장기하와 얼굴들 페이스북, 하세가와 요헤이 트위터

-선물로 준 티셔츠는 입고 방송에 나오실 생각 없어요? 예를 들면 SBS 라디오 '장기하와 대단한 라디오'의 LP바 코너요.

입고 방송국에 가지 않고 가지고 가서 인증샷을 올렸어요. '보는 라디오'라고 생방송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거기서 보여줬죠. 입고 인증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사실 입고 나가기는 좀 그렇고. (웃음)

-왜요. 문구가 별로? 하하하.

그래도 정말 고마우니까 보는 라디오에 가지고 가서 받았다고 보여줬죠. 다들 정말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죠. 티셔츠 만드는 데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한 장만 만드는 거 어렵다고요. 그래서 정말 고맙게 생각했어요.

-피드백을 원하는 팬들의 사랑이 가끔 부담스럽진 않나요?

제가 YG에 있는아이돌도 아니고, 피드백 달라고 하는 사람도 한 열 명? 하하하. 그러면 피드백 줄만 하죠. 고맙다고. 그런데 무한도전나간 뒤 불특정 다수가 많아졌어요. 어쩌다 제가 답맨션을 보내면 저와 굉장히 친해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계속 액션을 원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조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눈에 익은 아이디라면 한 번씩은 답해줘요. 그중에 친한 사람도 있고 만날 오는 사람도 있고요.

- 무도 출연 후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나요? (디시 이용자 'θ프')

알아보세요. 많이요.

-식판 들고 인지도 실험할때와는 다르나요? (웃음)

어떻게 보면 제가 웃기게 나왔잖아요. 저를 보고 다 웃어요. 잘 생긴 사람을 보면 웃지는 않잖아요? 예를 들어 배우라면 '아, 멋있다, 잘생겼다' 아니면 '실제로 보니까 별로더라' 이런 식이지만 하하하이러면서 웃지는 않는데, 저를 보면 바로 웃어요. (웃음)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사진 찍자고 하시는 분들 계신데, 가능하면같이 찍어요. 무도 나이트 때는 제 이름만 나왔는데, 가요제 두 번째 방송이 YG식당이었나? 그 이후 사람들이 검색을 많이 했는지 제연관검색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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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요?

'하세가와 요헤이 냉면', '하세가와 요헤이 장기하와 얼굴들', '하세가와 요헤이 김창완 밴드', '하세가와 요헤이 뜨거운 감자' 이정도였는데, 지금은 '하세가와 요헤이 국적', '일본인', '외국인' 이런 것들도 뜨고, '하세가와 요헤이 식판'도 뜨고요. 'YG 식당'도 떴어요. 그런데 세 번 째 방송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식판 들고 밖에 나간 것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죠.

-무도 전부터 양평이형을 잘 알던팬들은 형 얼굴 알려져서 좋기는 하지만, 스타일리쉬하게 기타 잘 치는 기타리스트 양평이형이'식판 들고 있는 양평이형'으로 인식되는 게 아쉽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걱정하지 않았어요. 꾸준히 음악 해왔으니까요. 저는 십 몇년 동안 여러 밴드를 했잖아요? '뜨거운 감자', '산울림', '김창완밴드', '황신혜밴드'… 지금 '장기하와 얼굴들' 하고요. 오히려 다행이었죠. '한국 와서 좀 활동해 볼까?' 하는 야망이아니라는 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는 음악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걱정 하는 팬들에게는 '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 기타색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얼마 전 (신)윤철이 형과 같이 공연했는데, 원래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분들과 '양평이형이 기타 치니까 한 번 가자', '검색했더니 양평이 형이 이런 기타리스트네' 해서 오신 분들 덕분에 놀랄 정도로 공연장에 평소보다 사람이 더 왔어요.

-클럽 '빵'에서 하셨죠?

네. 그때 유료관객이 100명을 넘었고, 지인이라면서 그냥 들어오는 사람들까지 하면 130명 정도 넘었어요. 입구에 사람 벽이 만들어져서 못 들어갈 정도였어요. 저는 그 정도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리허설 끝나니까 사람들이 밖에 줄 서있는 거예요. 그 분들 다 들어가니까 100명이 넘었더라고요. '정말 괜찮았던 거구나' 많이 느꼈지요.

-'무한도전'이 음악 활동 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됐네요.

저는 자기 음악성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뭘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전부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아 이런 형이 아닌데'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흔들리지는 않는구나'라는 걸 알리면 되는 거니까요. 저는 어차피 저니까요. 그런 분들에게 '나는 나니까 이런 걸 한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만약 제가 여기서 공연을안 하고 TV나 예능 쪽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는 거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어떻게 되든 꾸준히 공연을 해 나가니까요.

-'세븐티 핑거스' 프로필사진에서 장기하, 하하가 아닌 양평이형이 메인에 섰어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얼굴마담이 바뀐 거 아니냐는 우스개소리가 나오고 그래요.

장기하와 얼굴들은 당연히 기하가 있어야 장기하와 얼굴들이죠. (웃음) 그리고 기하는 당연히 메인이죠. 리더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기하도 그런 부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자기와 장얼 멤버 이렇게 따로가 아닌, 제가 앞으로 나간 덕분에 다른 멤버가 있다는 것도 알리게 되는 거죠. 그게 다른 멤버들에게도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밴드잖아요. 저번에 다른 인터뷰에서 기하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밴드가 무대에 서도'장기하가 나왔다', '장기하가 왔다'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왔었데요. 그런데 요즘은 '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장기하와 얼굴들이 왔다'라고 나오는 기사를 보면 밴드로서 정체성이 잡히는 더 좋은 효과도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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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가운데로 간 건, 촬영 자리에서 하하가 '양평이형 가운데로 서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나서서 그런 것도 아니고, 기하가 '이번엔 형님이 가운데로' 이것도 아니었어요. 하하가 그냥 '양평이형이 가운데로 서세요. 양평이형이 가운데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는 양평이형이 무대에서 솔로 할 때 '불꽃기타' 효과를 줘서 이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작진이 일부러 양평이형을 가운데 세워놨나 했죠.

하하의 생각과 제작진의 생각이 통한 부분은 있었겠죠. 그렇다고 제가 가운데로 간 것과불꽃 솔로를 한다는 게 큰 연관이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솔로 때 뭔가 터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하하였어요. 하하의 그런 생각이 그때그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안 위험해요?

이야기했죠. 이거 괜찮냐, 뜨겁지 않느냐고. 괜찮을 거래요. 불꽃이 앞으로 나가지 뒤로는 나갈 일이 없다고요. 그런데 기타 솔로 칠 때 제가불꽃 스위치를 눌러야 해요.

-네? 진짜요? 그럼 기타 치다가 눌러서 불꽃 낸 건가요?

심지어 그게 안전장치가 있어서 장치를 한 번 풀고 눌러야 해요. 기타 솔로 전 기타 리프가 단순한 반복이긴 한데 중간에서 한 손으로 연주하고, 다른 손으로 안전장치를 풀고 솔로 연주할 때 불꽃 스위치를 눌러야 했죠.

-정신 하나도 없었겠어요.

네. 게다가 기타 바디에 카메라가 있었어요. 그러면 무게도 달라지고, 밸런스도 달라지니까 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그거 때문에 양평이 형 나올 때마다 웃긴다고 했어요. (웃음)

그건 정말, 하하도 그렇고 무도 스태프들도 그렇고 정말 대단한 거예요. 모든 걸 100%, 그게 안 되면 98%까지 하겠다, 99%까지 하겠다 하는 노력이 나오는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하나로 뭉쳐 가는 걸 보고 '이래서 이 프로그램이 굉장히 사랑받고 있구나' 느끼게 됐지요.

-'슈퍼잡초맨'의 중간 부분에 노이즈가 귀가 아플 정도로 심하다는 비판이 있어요. 그래서 왜 그걸 넣으셨는지 궁금해요.

'열 받게 하지 말라고'라는 에너지를 살리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우리가 노이즈를 내려고 했기 때문에 귀가 아픈 정도로 노이즈가 심하다는 반응이 나온다는 건의도가 성공한 것같아요. '이게 뭐지?', '뭘 하고 싶은 거지?' 이렇게 된 것이아니라 '아오, 너무 시끄러워!' 이렇게 되는 게 성공이죠. 어떻게 보면요.

사실 고민은 했어요. 그 부분 때문에 방송에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요.방송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음원보다는 현장에서 라이브를 강하게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음원은 음원이고, 라이브는 더 열심히 하자 했어요. 라이브는 센데 음원은 얌전하다는 의견이 나왔죠? 그게 그거예요. 라이브에 맞춰서 만든 노래라서요. 그리고 라이브가 먼저 방송됐잖아요. 음원이 나중에 나오고. 그래서 그럴 수도 있어요.

-김C 분과 '뜨거운 감자'에서 함께 있었는데 무도에서 두 분이 이야기를 안 해 둘이 안 좋게 헤어졌나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하하.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그런데 김C와 지금도 연락해요. 무도 끝나고 뒤풀이에서도 둘이 한참 마셨어요. 옛날이야기도 하고요. 김C가 무도 나이트에서 저를굉장히 반가워하는 거예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이야'라며. 저는 심지어 김C가 독일 베를린에 살 때도 놀러 가고, 김C 집에서 자고 그랬어요. 그래도 띄엄띄엄 보니까 무도 나이트에서오랜만에 봐'오랜만이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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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김C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했어요. 김C는 저를 '요짱'이라고 불러요. 하세가와 요헤이니까. '요짱, 무도 한 번 나가면 아마도 한동안 걸어다니기 힘들어질 수 있어. 되게 불편해질 수 있어. 이게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라고요. 저는 '설마, 나는 별로 안 나올 거예요' 했어요. 사실 첫 회는 제가 잘 안 나갔어요. 그런데 두 번째 방송 나가고 나서그 이야기가 뭔지 알았죠. 특히 홍대같은 데를 돌아다니면 다 알아봐요. '양평이형 아냐?' 이렇게.

제가 김C와 방송 때 이야기를 안 했다는 건, 안 나왔을 뿐이에요. '여기까지 찍겠습니다. 잠깐 쉬겠습니다' 하고 쉴 때대기실에 가면 계속 이야기했어요. 또 자리도 먼 데다가 김C는 준하 씨와 이야기해야 하고, 저는 하하와 멤버들이 있었잖아요. 방송에서 멤버들끼리는 서로 이야기했지만,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이야기하지는 않았잖아요. 방송에서 안 나왔을 뿐이지 김C와는 계속 이야기했었어요.

- 과거 양평이형이 한 인터뷰에서 '부모님이 알려진 배우라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귀찮게 하는게 싫었다. 돌멩이 같은 삶을 살고 싶다'라고 했는데, 어느새 부모님처럼 남들이 알아보는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묘할 것 같아요.

네. 사실 저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기차를 타고 가는 것뿐인데, 잠깐 졸은 다음일어나보니 완전 다른 경치가 보이는 그런 거 있잖아요? 기차에서 내리니까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인종이 있고, '저 사람 어디서 온 거지?'라고 나를 보는 듯한 느낌? 저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앉아 있고, 눈 감고, 눈 떴는데 완전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

-그래서 계속 '짧은 봄'이라고 한건가요? (디시 이용자 '.')

사실 미디어라는 건계속 새로운 걸 해야 그 위치에 있을 수 있잖아요. 새로운 걸 안 하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단 말이에요. 재밌게 봤었던 사람들까지.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더는 이런 미디어에 나올 기회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방송에서 섭외가 오면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저한테 섭외 오게 하는 노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일부러 예능 쪽으로 더 나가 '저한테 일 주세요'라고 어필하는 건 아니고요.저는 제 페이스대로, 내가 걸을 수 있는 속도로 가는 것뿐이에요. 거기서 누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그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제 말은 남들이 볼 때 '짧은 봄'이라는 거겠지요. 물론 저도 '아, 사람들이 되게 재밌게 봐주는 거니까 이게 봄이라면 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봄이 끝나면 여름이 오죠. 뜨겁게 활동해야 하는. (웃음)

아, 그러네요. 사실 저는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바람 나오는 집에서 가만히 있어서요.

-안 나가세요?

땀이 많이 나서요. (웃음)

-원래 여름 안 좋아하세요?

아뇨. 좋아하는데, 여름은 여름 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겠죠. 여름이 왔다면 여름 대로 살아가는 거고요. 지금 정말 여름이 왔는지, 조금 더 봄이 가는 건지 아니면 갑자기 날씨가 이상해지고 추워질지 모르니까요.

-이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음악적 역량을 보여줘야겠다는 욕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그것보다는 장기하와 얼굴들의음악성 퀄리티를 유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윤철이 형과 같이 하는 걸로 보여줬으니까요. 아주 많은 사람 앞은 아니지만. 저는 꾸준히 그런 식으로 가는 거니까요. 지금 대중에게 보여준 모습이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밴드의 하세가와 요헤이라면, 이제 저는 '무도에 나갔는데 장얼 음악성이 이상해졌다' 그런 말 나오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게 지금 저의 일이에요. 저는 흔들리지 않는 게 있고, 또 괜찮으니까 이제는 장기하와 얼굴들에 더 노력하고 신경 써야 하는 거죠.

-장기하와 얼굴들 2집이 평단과 대중 양쪽에서 모두인정을 받았고, 여기에 무한도전 후 기대감까지 더해지면서 3집은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둘 중에 하나예요. 많이 팔리거나 화제가 되거나. 예를 들어 타이틀곡이 1위, 2위가 될 정도로 정말 잘 나가게 되는 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는 팔렸지만 음악 퀄리티가 상당히 높은 거. 그 둘 중에 하나는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둘 다 잡으면 좋죠. (웃음) 두 개를 다 잡은 게 2집이니까요. 제 생각은.



-2집 발표 후 장기하 씨가 쓴 일곡일담을 보면 양평이형이 앨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많이 한 걸 알 수 있는데, 그런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디시 이용자 '콩')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음악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 나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어요. 특히 록에 대한 건 거의 다 나왔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옛날 음악을 다시 하는 경향이에요. 블루스의 진화형, 사이키델릭의 진화형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많잖아요. 이것과 저것을 섞어서 새로운 걸 만드는 방식도 있으니 아예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처음부터 샘플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많이 안 들으면 샘플이 안 나오는 거죠. 무조건 많이 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비상사태가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 이걸 알아야 하잖아요. 지진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살아나는 방법을 공부하잖아요. 음악도 똑같은 거예요. 살아나는 방법을 공부하다 보니까 예전 음악을 많이 듣게 되는 거죠. 지금 음악도 그렇고요. 음악을 많이 들어야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거죠.

-LP가 7000장 정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건 저도 몰라요. CD, LP, 카세트 다 사니까몇 장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한국에 오면서 많이 팔았으니까요.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야 했거든요.

-'곱창전골'이라는 일본인 밴드로 한국에서 활동했는데, 일본인 밴드라 한국 클럽에서 받아주지 않아 생활고를 겪었다고 들었어요.

그렇죠. 활동하려면 비자가 필요하고, 비자가 없으면 연주를 못하잖아요. 개런티도 받지 못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료 공연으로 하고. 돈벌이가 안 되는 거죠. 저는 부모님의 도움이 아닌 자기 힘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한국에 무비자로 2주만 있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 한국 와서 2주 있다가 다시 일본 가고, 다시 한국 와서 2주 있고.그걸 한 달에 몇 번 반복했어요. 그러면서 모았던 LP를 팔고, 그 돈으로 한국행 비행기 표 사고, 한국에 와서 LP도 사고, 숙식도 해야 하니까 또 돈 쓰고. 그랬죠.

-그런 노력을 하면서까지 한국 인디신에서 활동하신 이유는 뭔가요? 일본 인디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도 활동했었어요. 한밴드는 대형 음반사에서 음반 내자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 인디에서 3개 밴드를 동시에 했어요. 그게 마침 다 해체되고, 그렇게 관두다 보니밴드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건 신의 계시다' 해서 한국에 오게 되고, 계속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저는 '여기서 돈을 벌겠다', '활동 꼭 하겠다' 이런 야망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람을 알고, 여기에 계속 오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사람을 알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음악을 하는 거였어요. 음악을 하게 되니까 사람을 많이 알게 되고, 한국 사회나 문화도 알게 되더라고요.

-일본에서 인디활동하실 때는 어떤 음악을 주로 하셨어요?

비슷하죠. 저는 사이키델릭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걸 하고, 지금도 일본 가면 같이 연주하는 친구들 있어요.

-'곱창전골'이라는 밴드는 일본에서 결성한 밴드가 맞나요?

네. 맞아요.

-그럼 거기 멤버분들이 동시에 한국으로 넘어오신 건가요?

이미 일본에서 활동을 오래 했었는데, 저 빼고 리더 했던 분, 베이스 했었던 분들이 다들 직업이 있었고요. 그런데 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 자유로웠어요.

-양평이형 부모님이 일본 유명 배우인 사실이 기사화됐는데, 이때 사람들이 '배우 아들보다는 일본인이란 사실이 더 놀랍다'라고 했어요. 양평이형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안 거죠.

왜 일본인이라는 게 놀라운지 오히려 궁금해요. 제 이름 검색하면 '하세가와 요헤이'라고 나오잖아요. 아무리 봐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라는 생각은 못 해도 저는 한국인이 아닌 거잖아요.

-일본인 특유의 한국어 억양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아,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저 진짜 놀랐어요. (웃음) '일본인이었어?' 이런 이야기가 아직까지 나오는데, 그게 만약 말 때문이라면 저에게는 영광이죠. 그만큼 자연스러워졌다는 거니까요. 저도 왜 놀라는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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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에는 '양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도 계시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한국인이겠지' 생각한 거죠.

아, 그럴 수도 있네요.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보다 한국 인디신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니 일본인이 한국 와서 활동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거죠.

힘들다는 게 뭐가 힘들다는 건지 알고 싶어요.

-2000년대 중반 대형 방송사고 이후로 인디신이 4~5년 정도 암흑기였잖아요. 클럽 공연 자체도 불법이라며 말이 많았고. 인디밴드 음악 방송도 다 취소되고. 방송에 나가도 관계자들이 사고 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그래서 생방송으로 나오는 음악방송도 실제보다 조금 늦게 방송되는 거죠?

-네. 그래서 척박한 인디시장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한국에세계 2위 음악시장인 일본의 뮤지션이 왜활동하는 거지? 의문이 생기는 거죠.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세계 2위 시장이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일본을 부러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은 밴드가 클럽에 나가잖아요? 돈을 내야 해요.

-받는 게 아니라요?

네. 돌려서 돈을 내는거죠. 예를 들어 하루에 다섯 개 밴드가 나온다면 클럽에서 한 밴드당 20장 정도 티켓을 줘요. 이걸 팔라는 거죠. 만약 5장 밖에 못 팔았다면 나머지 15장은 밴드가 사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밴드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거죠. 클럽 주인은 배고픈 거 없이. 일본은 클럽 시스템이 좋다고 하는데, 당연한 거죠. 클럽은 손해가 없으니까요. 그만큼 밴드에게 부담이 가는 거죠. 이름이 좀 있는 밴드는 당연히 '무대 나가도 된다' 하고, 밴드가 좀 팔린다 싶으면 그냥 나오라고 하는데 정말 밑바닥에서 하는 밴드들은 그 부분에서 힘든 거죠. 그걸 제가 경험했어요.

-우와 심하다.

그래서 처음 한국 와 깜짝 놀란 게, 관객 몇 명 없는 공연을 했는데 공연장 사장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미안하다, 내가 홍보를 잘 못해서 관객이 별로 안 왔다'라고요. 아니, 이게 미안한 게 어딨느냐고요. 우리는 돈 안 내고, 이만큼 해 준게고마운데. 사장이 '미안하니 우리가 뒤풀이는 쏠게' 이러는데 인간적인 거예요. 정이나 인간적인 면에서 연결되는 게 있어요. 장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은 음악이 좋아 클럽을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렇다면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이 있겠죠. 제가 그런 초창기 한국 인디신을 경험했고, 그걸 정말 감동적으로 봤어요.

-국내 알려진 일본 밴드들 같은 경우는 인디즈를 거쳐 메이저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으니 '아, 일본 인디 환경이 더 좋겠구나' 생각하거든요.

한국에서 공연하는 밴드는 일본에서 알려졌으니 올 수 있는 거죠. 만약 알려지지 않은 밴드가 한국에서 공연하려면 자기가 비행기 표 내야 하고, 공짜 공연해야 하고. 다 처음부터시작해야 해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자기 일을 하면서 계속 밴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 돈을 받고 연주한다는 게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꿈같은 일이에요. 일본에서는 이런 합주실이 있고, 음악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될 정도의 돈을 번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와~ 너 진짜 대단하다'라고 할 거예요. 일하면서 자기 음악을 하는 게 일본에서는 당연한 거니까요.

-무도로 유명해지면서 양평이형이 한국에 온 이유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고, 다른 매체에서도여러 번 이야기를 하셨지만, 한 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네. 제가 20대 중반쯤에 일본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했었죠. 그때 점장이 단골손님한테 '진짜 특이한 알바생이 있다. 나이도 어린데 사이키델릭을 좋아하고, 굉장히 음악을 많이 안다. 너한테 맞을 거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손님이 나중에 '곱창전골' 리더가 되었어요. 그분과 친해져서 같이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는데, 그게 1994년일 거예요. 그때 제가 영국 런던에 가서 2~3주 정도 있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아, 역시 음악 하려면 여기에 와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했던 밴드도 다 그만두고'런던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런던에서 오래 있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 사이에 단골손님이었던 그분이 한국 갈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다녀왔대요. 그러면서 '내가 한국에 다녀왔는데 정말재밌더라' 이야기하시기에 '뭐가 재밌어요?' 물으니 '옛날 음악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거기서 CD를 샀는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왔으니까 한 번 들어봐라. 속았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들어봐라 이건 분명 하세가와가 좋아하는 거다'하면서 테이프를 줬어요. 받고 들었는데 충격적인 거예요. A면에 신중현과 엽전들, B면에 산울림 음악이들어있었어요. 이런 음악이 옆 나라에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사실 그 전만 해도 저는 조용필 씨밖에 몰랐어요. 심지어 조용필 씨는 일본 TV에 나와 트로트 같은 음악을 부르셨거든요. 한국에서는로큰롤 하시는데. 감을 못 잡겠는 거예요. 이런 록이 있었다는 걸 아예 생각도 못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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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연구하고 싶다'였어요. 그래서 판을 사러 한국에 왔어요. 음악 하러 온 게 아니었어요. 그때는 인터넷이 없으니 살 방법이 없고, 한류 붐 이런 것도 안 왔고, 심지어 2002년 월드컵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도없으니까요. 아무 연결이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처음 여기 왔어요. 음반사러.

-하하하. 몇 장 사셨어요?

몇 장 못 샀어요. 음반 가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큰 곳밖에 없었거든요. 종로 뮤직랜드 정도밖에 몰랐어요. 그런데 처음 한국에 도착해김포공항에서공항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던 종로로 가면서 중간에 경치를 보는데, 중고 LP 가게가 휙 지나간 거예요. 그거 보고 내린다고 벨 막 누르고, '아저씨, 아저씨 중고가게!!!' 이러면서 내리고. 하하하. 거기 가서 처음으로 중고가게가 있다는 걸 알았죠.

-'곱창전골'이라는 이름은 리더인 사토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밴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홍대 앞 LP바 곱창전골과 무슨 관계예요?

상관없어요. (웃음)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먼저죠. 하하하. 그런데 뭐 곱창전골은 음식 이름이니까. 제가 알고 있는 건 곱창전골 LP바에는 따로 사연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곱창전골'은 사토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그게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지 않을까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에요. 처음에 한국 왔을 때 한 음식점에 갈비를 먹으러 갔는데, 다른 손님들이 새빨간 뭔가를 먹고 있는 거예요. '저건 뭐지? 우리만 갈비 시키고 다른 사람들은 갈비 안 시키고 저걸 먹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그 가게가 곱창전골 전문 가게였고, 갈비도 메뉴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게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가 보다 했어요.'이름이 뭐지? 곱창전골? 아!' 이렇게 된 거죠.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모를 만한 음식을 원했어요. 국밥, 갈비는 알지만 곱창전골은 그때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거든요.

-어머니께서 양평이형이 어릴 적 한국 점술가에게 점을 봤는데 '아드님이 기타를 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한국에 가서 기타로 성공하게 됩니다'라는 점괘가 나왔다는 게 사실이에요?

네. 사실이에요.

-어머! 진짜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점을 언제 본 거예요?

제가 중학교 3학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아예 한국과 연결이 안 되는 때였죠. 곱창전골이든 신중현 선생님이든 산울림이든 연결점이 아예 없었을 때. 어머니께서 모 잡지의 편집장 분과 아는 사이였는데,그분이 '굉장히 잘 맞추는 점술가가 있다. 점 받을 수 있는데혹시 보러 지금 올래?'해서 친구들과 갔대요. 그때 가셨던 분이 류이치 사카모토 씨 매니저와 어머니 친구였던 그 잡지 기자의 여자친구분. 이렇게 셋이서 가셨어요. 어머님 차례가 왔는데 점술가가 '당신은 배우로서는 여기가 한계다' 이랬대요.

-우와, 세다. 하하하.

그분한테 점 보러 일본 정치가도 왔었대요. 그런 분으로부터 우연히, 시간이 있어서, 그것도 고깃집에서 점을 봤대요. (웃음) '당신은 여배우로서 한계가 왔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갑자기 '당신 애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대요. 그래서 '있다'라고 하니 아이 이름이랑 생년월일 써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 걸 써줬는데 그분이 깜짝 놀라며 '이 사람은 돼지해, 돼지날, 돼지시에 태어났다. 굉장히 운이 좋다. 강한 운을 가지고 있고, 서른 넘어서는 계속 뭔가가 잘 된다. 이 사람은 예술 같은 걸시키는 게 좋겠다. 혹시 하고 있는 게 있느냐'라더래요. 그래서 '요즘 기타 사서 치고 있다"라고 하니 '기타를 치고 한국으로 갑니다'라고 했대요. 뜬금없이. 어머니는 '이 사람이 뭘 말하는 건가' 했대요. 그런데 계속 '한국 가면 서른 살부터 음악으로 일이 잘 되고, 계속 올라갑니다. 떨어지지 않고요. 환갑까지 계속 갈 거예요'라고 했대요.

-거기 어딘가요? 가고 싶다!

모르겠어요. 권 씨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셨던 게 다 맞아요. 고기와 술 조심하라고 했어요.

-하하하. 왜요? 술 많이 드신다고 들었는데. 장얼 뒤풀이가 지옥이라면서요.

아, 그건 저를 빼고 그런 거고요. 특히 기하랑 민기는 진짜 죽음이에요. (웃음) 저는 도망 나오죠.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거예요?

한 번 건강이 안 좋아졌죠. 그래서 힘들어진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가 안 되니까 친구들과 만나면 한 잔 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는 술 마시면 더 마시라고 권유하잖아요. 그런 문화를 뚝 끊을 수는 없고, 그렇게 술잔 받다 보니 만날 술 마시고, 아침까지 마시다 보니 망가진 거죠. 일본 병원 갔더니 술 줄이래요. 그 이야기 듣고 줄이기 시작했어요. 또 몸도 자연스럽게 힘들어지더라고요. 술 줄일 때가 됐구나 했죠. 술도 줄이고, 담배도 지금은 끊었어요.

-모범적인 생활을 하시네요.

술 마시는데요, 뭐.

-어차피 조금 마시는데요. (웃음) 여러 밴드에 계셨는데, 왜 밴드를 여러 곳으로 옮기셨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었어요. 이 분은 본인이 우리나라 밴드 특성을잘 모른다고 이야기하셨어요. (디시 이용자 'θ프')

옮기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뜨거운 감자' 같은 경우는 처음엔 '나는 이 밴드를 안 하는 게 좋지 않나' 생각했었어요. 지금과는 음악이 전혀 달랐으니까요. 좀 더 야성적인 게 있었는데, 저는 그런 쪽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다 싶은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계속 주위 사람, 아는 동생이 '하면 좋을 거야'라고 이야기해서 하게 된 것도 있고요.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만두는 게 낫다' 고민해서 그만둔 경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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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 출처 하세가와 요헤이 트위터

'황신혜밴드'는프로젝트에 따라 멤버를 계속 바꿔가는 밴드였어요. 다른 프로젝트로 간다고 해서 저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죠. 뭐라고 해야 하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요.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 이사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 집이 살기 힘들어서 이사 간다는 게 아니라 살다 보면 이사 가게 되는 그런 경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불만이 있어서 나간 밴드는 하나도 없어요. 상황이 안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싸워서 빠진 건 전혀 없어요. 아직도 그분들과 좋은 관계 가지고 잘 지내고 있어요.

-뜨거운 감자의 '좌절금지'라는 곡은 어떻게 만드셨나요? (디시 이용자 'iBhone')

그건 한 10분 만에 만들었어요. 10분? 15분? 제가 펑크를 좋아하는데, 펑크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펑크는 심플하잖아요? 심플한 노래를 만들자 싶어서 '이러면 어떠냐' 하고연주했죠. 김C가 괜찮다고 하고, 베이스와 드럼 치는 분도 같이 연주하면서 '됐다' 이러고. 제가 드럼은 이렇게 해달라, 베이스는 이렇게 해달라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노래는 먼저 완성되었고, 멜로디는 김C가 붙였어요.



처음 붙인 가사는 제 마음에 안 들었어요. 김C는뭔가 더 공격적인 가사가 좋다고 했고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처음에는 '우리 집에 놀러오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가사였어요. '이거 말고, 따뜻한 분위기 아니라 뭔가 뚫고 가는게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시 가사를 써온 게 '좌절금지'였죠. 이건 괜찮다 했어요.

-저는 '걱정마 요헤이'라는 곡이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 곡은 제가 모르는 사이에 완성되었어요. 노래는 먼저 완성된 상태였는데, 가사가 그런 가사인지 몰랐어요. 어느 날 오니까 그런 가사를 썼더라고요. 고마웠죠.

-그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나요?

김C는 제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지금 되돌아보면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혼자 한국에 왔고, '강산에밴드'에서 키보드 치던 아이와 같이 살았지만, 그래도 타지에 와서 사는 거잖아요. 용기를 주겠다며 '우리가 있으니까'라고 가사를 써준 것 같아요.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하셨나요?

아뇨. 당연히 하죠. 그런데'돌아가겠다'라는 것보다는 '한국에 언제까지 있게 될까?' 생각하게 되요.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 나를 언제까지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거죠. 저는 어차피 지금 일본에 가든,10년 후에 가든, 5년 후에 가든 이제 한국과 인연은 못 끊어요. 말도 이렇게 하고, 한국 문화도 조금 알게 됐고, 심지어 일본보다 여기에 아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인연을 끊겠어요. 독일에 가도, 뉴욕에 가도, 런던에 가도 한국 사람 보면 반갑고, 이야기하고 그러잖아요. 인연은 절대 못 끊어요.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저를 받아줄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제가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그거만 생각해요. 힘들어서 돌아가겠다거나 언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왠지 일본에서 '여기서 활동할 생각 없느냐'라는 제안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뇨. 전혀. 제가 놀라는 게 저는 미디어에 거의 안 나왔던 사람이거든요. 김창완 선생님은 굉장히 유명하시잖아요. 드라마도 나오시고. 그렇다고 그분이 밴드를 하고, 거기에 일본인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없어요. 저한테 주목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다고 '주목해달라' 그런 것도 없고. 그런데 사실 마니아 사이에서는 제가 조금씩알려졌죠. 한국 음악 좋아하고, 일본에서는 한국 음악 디제잉하고. 그런 식으로 음악 마니아 사이에서는 '한국음악이라면 하세가와 요헤이'라고 알려졌죠. 그러다가저번 무도 방송하고 일본에서 디제잉을 했는데, 무도 본사람들이 보러 온 거예요. 엄청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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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도 하시고, 프로듀서도 하시고, 기타도 치시고, 못하는 게 뭐예요?

하하하. 노래도 못 하고 결혼도 못 하잖아요.

-싱글녀 검색어 1위! 싱글녀들의 로망! 하하하.

말이 그렇지 저한테는 그런 상황이 없어요. (웃음) 오히려 더 어렵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저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쉽게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방송 출연 후 잘 되어 가는 여성분 있느냐는 질문 있었어요. (디시 이용자 '존슨즈')

그러니까요. 쉽게 다가오면 좋죠. 제가 다가가도 상대가 '아, 그런 건 아니겠지?' 생각하는 것도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나이가 너무 어리세요. 저는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상관없어요. 상대가 상관없으면 저도 상관없어요.

-결혼할 생각은 있으세요?

당연히. 당연하죠. (웃음) 그런데 이상하게 상대가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예전보다 더 어렵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숲'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BGM이 되지 않은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하셨잖아요? 대표적인 예를 들어준다면요?

비틀즈 같은 경우는 비틀즈 노래 나오면 그래도 귀가 그쪽으로 가게 되지요. 상대와 이야기하는 데도 다음에 어떤 가사가 나오고, 어떤 멜로디가 나오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기 때문에 귀가 많이 가게 되지요.

-여자 분하고 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비틀즈 노래가 들려서 신경 쓰신 적은 있나요? (웃음)

그건 아니네요. (웃음) 그런데 비틀즈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니 신경 안 썼네요. 사실 저는 BGM이라고 생각하는 음악 폭이 좁은 것 같아요. 그래도 직업상 귀가 가게 되니까요. 정말 듣기 싫은 곡이 아니라면요.

-장기하 씨가 쓴 글을 보니까 웬만한악기가 내는 소리 자체를 다 아시는 것 같아요.

아직 멀었어요. 드럼 같은 경우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그런데 드럼은 기하가 다 아니까. 기하는 드러머잖아요. 그 부분에서는 기하에게 많이 의존해요. 그런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밴드 앙상블을 생각할 수 있는 게 다른 멤버보다 조금 더 있다는 거? 이걸 어떻게 연결하면 재밌는소리가 나고, 또 대충 나오는 소리를 예상할 수 있다는 거? 그게 지금까지 해 왔던 경험이 쌓인 게 아닌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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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말로, 저는 양평이형이 '사운드 오타쿠'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노래에 자기 고집을 넣기보다는노래에 맞는 사운드를 만들고 싶어요. 자기 사운드를 꼭 내야 한다는 게 아니라요. 예를 들어 제가 아이돌 같은 사람과 같이 작업하게 되면 거기에 맞는 소리를 연구하는 거죠. 저는 고집이 없는 게 고집이에요. 고집에 집착하면 모든 걸 못해요. 고집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꼭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것 대로 해줄 수 있다는 것도 고집이거든요. 그건 실력이 없으면 안 돼요. 제가 안 좋아하는 게 자기가 모르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음악이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지만, 사실 음악이에요. 음악인데 모르니까 '야, 음악이라는 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저는 그러지는 못해요.

-음악 하시는 분들 중 특정 음악 장르를 고집하시는 분들은 별로 안 좋아하시겠어요.

아뇨. 자기네 세계가 있는 건 대단한 거니까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음악 외 장르는 다 아니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요.

생각의 방법이 다른 거죠. 저는 그 고집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저도 당연히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그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과 어느 정도 딜이 가능한지, 밀어붙이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한 건지 생각하는 거죠.상대방을 받아들여 거기의 좋은 부분을 붙이고 내 좋은 부분을 붙이면 더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긍정적인 생각으로 그러는 거예요.

-양보하지 않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그건 하다 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하다 보면 자기 색깔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냥 하면 내 색깔이 나올 수 있다는 자신감.

-장기하와 얼굴들 2집에서 양평이형이 만들어낸 사운드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알려주신다면요?

'그렇고 그런 사이'의 건반 소리,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의 건반 소리. 그리고 '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의 드럼 소리. 되게 많아요. 그것도 재밌게 만들었어요. '모질게 말하지 말라며'의 인트로. 재밌는 시도였죠.

-장기하와 얼굴들 1집에서 2집으로 넘어오면서 큰 폭의 음악적 발전을 이뤄낸 것이 하세가와 요헤이의 영입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동의하시나요?

그렇게 평가해주시면 저야 좋죠. (웃음) 사실 사람이 한 명 들어가면 당연히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요. 또 저도 사실 노력을 했어요. 노력의 결과가 그렇다면 정말 성공한 거죠. 제 노력이.

-12월에 공연하는데 특별한 이벤트 준비했나요?

있다고 하네요.



-아니, 왜 딴사람 이야기하듯이. (웃음)

지금 상의 중이라서요. 이런 게 있다 이렇게.

-아까 이야기하신 K.E.B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제가 원래 윤철이형 기타를 좋아해요. 신중현 선생님, 김창완 선생님은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보다는 선생님이고 거장이잖아요. 그런데 신윤철 씨는 저보다 2살 많으니 형이에요. 형으로도 굉장히 매력 있고, 형 기타도 정말 좋아해요. 형 기타를 듣고, 형과 사이키델릭한 소리를 실컷 낼 수 있는 밴드를 하고 싶어서 만든 거예요. 처음에는 일본에서 공연을 먼저 했어요. 몇 주 전 공연한 게 한국에서는 처음이었어요. 일본에서 공연했는데 느낌이 좋았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해보자' 해서 했는데 그게 몇 년 걸렸네요. 윤철이형도 '서울전자음악단'에 있었고, 저도 '장기하와 얼굴들'과 '김창완밴드' 하느라 스케줄이 잘 안 맞았던 거죠. 그런데 윤철이형이 서전음 안 하시고, 저도 '장기하와 얼굴들' 하나만 하게 되면서 했죠.그런데 저번 공연 때합주한 시간 밖에 안 했어요.

-그래도 돼요? (웃음)

네. 심지어 공연 때 할 노래도 그 자리에서 결정해 '이런 리프다' 하고치고, 드럼과 베이스 거기에 맞춰서 했어요. 그렇게 해도잘 할정도로, 통하는 사람과 정말 재밌게 즐겁게 연주하자고 해서 하는 거죠.

-뭐의 약자예요?

코엔지(高円寺) 일렉트로닉 밴드예요. 처음 공연했던 곳이 코엔지였거든요. '서울전자음악단'이 있었으니, 코엔지전자음악단인거죠.

-저는 한국외환은행인가 했어요. 하하하.

그런 생각 많이 하시죠. K가 코리아라고. (웃음) 일본의 홍대 같은 곳이에요. 밴드 많이 살고 공연장도 많은 곳.

-일본에서 단행본 내세요? 트위터 보니 작가분과 이야기하시던 게 있던데.

네. 한국 록에 대해서요. 그리고 제가 17~18년 동안 살아온 과정이요.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공연장이 이랬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저도 자꾸 까먹어요.

-나이 때문? (웃음)

그럴 수도 있고요, 너무 많은일들이 있었다 보니까 지금 이런 걸 남겨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요즘 눈여겨보는 신인 밴드 있어요? (디시 이용자 '킹킹')

재밌는(흥미로운) 밴드 말씀이시죠? '위댄스'도 재밌고, '룩앤리슨'은 제가 프로듀서를 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그리고 '로큰롤라디오'도 괜찮아요. 지금 생각나는 게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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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앤리슨(왼쪽)과 로큰롤라디오

-별로 없는 거예요?하하하.

바빠서 공연장을 못 가요. 보고 싶은데. 그래도 앨범 들으니까요. '위댄스'는 공연도 보고 그랬어요.

-바쁘게 활동하시나 봐요. 예전에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2011년)에서 하루에 세 번 밴드 다르게 무대 올라갔다면서요?

델리스파이스, 김창완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원래 바쁜 걸 좋아하세요?

아뇨. 그때는 고정 멤버 식으로 안 했어요. 김창완 밴드는 사실 멤버였지만, 다른 분들은 따로 일을 하셨기에 저도 마찬가지로 세션을 한 거죠. 당시는 장기하와 얼굴들도 세션이었고, 델리스파이스도 세션이었고.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와 굉장히 오랫동안 친구였으니 같이 했었고요. 또 민규와 인간적으로 잘 맞고요.

-친구 이야기 나와서 여쭤보는데 크라잉넛 한경록 씨와는 왜 애증의 관계예요?

아니, 경록이가. 하하하. 저만 보면 어려운 일을 하게 만들어요. 술 취하면 '아이~ 양평이형 노래해야지~'. 제가 슬슬 피해 가려고 하면 '양평이형 어디 갔어!' 이런 적도 있고. 사인회에 크라잉넛과 같이출연했는데, 제가 사인하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사인지에'술 작작 마셔 양평이형' 그렇게 쓰여있는거예요. 아무리 봐도 경록이가 쓴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장난 많이 쳤죠.

-자꾸 트위터에 음식 짤 올려 살찌게 만드냐고 해요.

이제 잘 안 하려고요. 올릴 때마다 팔로워가 빠져나가더라고요. (웃음) 정말 결정적인 것만 올려야지 자꾸 올리면 보는 입장에서도 '이건 아니다' 생각이….

-여자 팔로워들에게 먹는 사진은 테러죠. (웃음)

저는 잘 먹는 여자 좋아해요. (웃음) 너무 마른 여자분은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저는 진짜 조금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처음 만날 때. 그런데 조금 먹고 '맛있어요' 그러면 '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분이 계실 때가 있어요. 제 이상형은 정말 잘 먹는 사람.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맛있게 먹는 여자, 음식 먹을 줄 아는 여자 좋아해요.

-맛집 책내실 생각 없어요? (디시 이용자 'anomie')

저는 그만큼 폭넓게 먹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는 데만 가서요.

-미식가의 자세가 아니시네. (웃음)

그런데 일본에서는 많이 돌아다녀요. 여기서는 가는 데만 가고, 어떻게 보면 여기는 일터니까요. 여행 가면 당연히 폭넓게 먹어야 하잖아요? 여기는 필 관리가 되는 거만 먹어야죠. 냉면이라든가 햄버그스테이크라든가. '여기 오면 이렇게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다' 이런 안심할 수 있는 곳이요.

-냉면 잘 드신다고 들었는데, 존박 씨보다 잘 드시는 것 같아요? 하하하.

만난 적이 없어요. 언젠가 뵈었으면 하는데. 한 명 거쳐서 아는 사람이거든요. 기하나 이적이든. 언젠가 뵙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본인 삶에서 먹는 것과 음악 빼면 뭐가 남나요?

아예 안 남지 않을까요? 저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해요. '이 세상에서 음악 없어지면 어떡하지?' (웃음)없어지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만약 음악이 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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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어떻게 처음 접하시게 된 건가요?

친한 애가 통기타를 샀어요. 그걸 보고 '어, 나도 해볼까'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비틀즈를 들었거든요. 약간 막연한 그런 게 있었죠. 음악이라는 게 뭘까? 그런데 마침 친한 친구가 통기타를 산 거죠. 그런데 나한테 하는 말이 '사실 일렉기타를 사고 싶었는데 부모님도 있고 해서 통기타 먼저 샀어'였어요.그걸 들은 저는'일렉이 더 좋은가? 그럼 일렉부터 사지' 해서 일렉기타를 샀어요. 그러면서 치게 된 거죠.

-한국에서는 부모님들이 자식이 기타 치겠다고 하면 솔직히 별로 안 좋아하세요. 일본은 어때요?

저희 부모님 세대가 젊었던60년대 중반, 말 이때 일본은 밴드 붐이었어요. 일렉트릭 기타 붐이라고 해야 하나? 벤처스(The Ventures), 비틀즈 이런 밴드 노래를 듣고, 밴드 만들어 신사에서 연주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헐. 신사에서 연주하다니.

네. 넓은 곳이 없으니까요. 아니면 홀 같은 거 빌려서 하고. TV에서 일렉기타리스트 오디션도 했었어요. 그런데 부모님들 윗세대는 밴드는 불량소년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비틀즈가 공연하러 일본에 왔을 때도 '역사가 있는 무도관을 어떻게 비틀즈에게 빌려주냐' 이런 게 TV에 나왔어요. 또 그룹사운드가 유행했던 67~68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연장에 못 가게 했어요. 이건 말도 안 된다, 교육상 좋지 않다고요. 그랬던 분들이자기 딸이나 아들이 밴드 하면 반대하겠어요? '우리는 못 했던 건데', '나도 옛날에 기타 쳤어' 이러면서 같이 대화가 되죠. 또 아이들이 하니까 어른들도 '우리도 해보자' 해서 같이 밴드하고.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 밴드부가 있었는데, 선생님도 같이 밴드했어요.

-우와, 재밌겠다.

선생님한테 '이야~ 진짜 못 친다' 그랬어요. 하하하. 우리 학교는 선생님과 반말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연예계나 예술 쪽으로 나가는 학생이 많았어요.

-혹시 선후배 중에 저희가 알만한 유명인이 있나요?

츠치야 안나도 있었고, 나카무라 시도우는 1년 후배. '롤링스톤즈' 노래 불렀었죠. (웃음) 꽤 많아요. 또 학교에 기타 가지고 가도 선생님이 '오늘 스튜디오 가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옷도 자기가 입는 옷 입고 가도 되고, 심지어 모히칸 헤어로 온 학생도 있었어요.

-양평이형은 하셨어요? (웃음)

저는 안했어요.그때는 '펑크 스피릿이야' 이라고 하면 가죽옷 입고, 모히칸 하고, 수업 중간에 '스튜디오 가야 하니까 갈게요' 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그러 느낌이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펑크 스피릿과는 좀 달랐달까요.

-양평이형 정도로 기타를 잘 치려면 얼마 정도 연습을 해야 하나요?

저는 대놓고 '이렇게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한 만한 게 없었어요. 대신 틈만 나면만지고, TV 보면서 치고 그랬어요.마음먹고 '오늘은 다섯 시간 연습한다' 이게 아니라 계속 만지고 있는 스타일이었죠. 연주하고, 놓고, 밥 먹고, 음악 듣다가 거기에 맞춰 기타 치고. 이만큼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거의 없어요. 한국어도 그래요. 저는 '한국어 공부한다' 해서 공부하지는 않았어요. 좋아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공부해야 한다'라기보다는. 그래서 저는 공부 못 하잖아요. (웃음)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하하.

싫어하니까요.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죠. 공부 잘하는 건 공부를 좋아하는 거예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안 그러면 두 번이나 대학을 떨어졌겠어요?

-음악 하시는 분들 중 대학 진학을 생각 안 하시는 분도 계시잖아요.

그래도 살아갈 만한 면허가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핑계가 되잖아요.

-그럼 그때도 음악 쪽으로 지원한 건가요?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맞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도 안 했어요. 음악은 고등학교 때만 하는 거고, 대학 가서는 취미로 할 수 있지만 그냥 저는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했죠. 그런데 대학 두 번 떨어지고, 계속 밴드가 생각나니까 '이건 밴드 하라는 건가?' 했죠.

-점술가 좀 짱이다.

그렇게 되어갔어요. 길이. 자기도 모르게.

-본인이 개척한 것 같아요, 아니면 음악이 본인을 이끈 것 같아요?

어… 한국에 온 것도그렇고, 기타를 치게 된것도 그렇고, 음악을 많이 듣게 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흐름 때문에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강물에 떠 있는 낙엽 위의 벌레 같은 거예요. 흐르고 흐르다 보니까 하류로 가고, '여기는 어디지? 이렇게 되는 건가?' 이런 거였어요. 작정해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이런 거 없이 흐름에 따라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다른 경치가 보이고요. 어차피 힘을 써서 거슬러 올라가도 다른 세상이 오듯, 내려가도 다른 세상이 보이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럼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을 안 하는 대신 이렇게 내려가는 사이에 다른 노력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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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음… 열려있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자기를 압박하지않았으면 좋겠어요. '기타를 쳐야 해', '이때 연습해야 해' 이런 압박감을 스스로 갖지 않아도 돼요. 열린 마음이라는 게 그 마음인데, 할 때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심지어 기타를 한동안 안 잡아도 돼요. 살아가면서 분명 기타를 놔야 할 때가 있을 거예요. 힘들어서 놓게 됐을 때도 '언젠가는 기타 잡겠지'라고 생각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거고, '이제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 해서 기타를 놓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기타를 놓게 돼 한동안 안 치게 되는 걸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타가 자기를너무 고생하게 만든다면일단 기타를 놓고 생각해도 돼요. 꼭 기타 잡고 생각 안 해도 돼요. 그냥 기타 놓고 여행 가도 돼요. 지금 기타 치고 싶지 않다? 그럼 안 치면 돼요. 기타를 싫어하게 되는 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싱글녀의 로망이 되었는데,

실감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니, 이상형이요. 하하하. (디시 이용자 '뭔말이여','θ프')

아까 이야기했듯 식사를 정말 맛있게 먹는 여자. 너무 마르지 않은 여자. 저는 얼굴 안 따져요. 제 취향에 맞는다면 누군가가 '왜 그런 여자랑 사귀어?'라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더 멋있을 것 같아요. 다 비슷비슷하대요. (디시 이용자 'θ프')

아 그래요? 노력해볼게요. (웃음)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귀여울 수 있나요? (디시 이용자 '뭔말이여')

제가 작전을 세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뭐가 귀엽다는 건지 제가 알고 싶네요.

-장얼갤을 보니 '억울한 강아지' 같은 느낌이래요. 하하하.

귀엽다는 게 굉장히 안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여자가 남자한테 '귀엽다'라고 하는 건 '모성본능'이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럼 '저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아~ 귀엽네요~ 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귀여우니까 뭐를…?' 이라고.

-적극적으로 들이대라고 꼭 이야기해드릴게요. 하하하.

저는 작전을 세워주는 여자가 좋아요. '이렇게 해서 나한테 반하게 만들 거야' 이런 여자의 작전 있잖아요? 그런 작전에 걸리고 싶어요. 아니면 '오빠 나랑 사귀자. 알았지?'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여자.

-팬들이 다 '나랑 사귀어' 이러는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죠. 팬들은 절대 그런 거 안 해줘요. 하하하.

-왜요? (웃음)

몰라요. 하하하. 거기서 느낀 거죠. 아, 나의 나이를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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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얼에는90년생 어리고 귀여운 드러머가 있으니까. (웃음)

관심이 그쪽으로 가는 거 아닌가…. 하하하. 사실은 다른 멤버에게 가는 사람에게 '나를 봐라' 이런 건 없어요. 당연히 장기하 잘생겼고, 일준이 잘생겼고, 중엽이도 그렇고 민기도 그렇고 종민이도 그렇고 당연히 그쪽으로 가죠.

-마지막 연애는 언제인가요?

연애라고 하기에는 힘든 그런 게 있었어요. 1년 전인가?

-에이, 알아서 잘 찾으시네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한테 안 오는 거예요. 하하하. '알아서 잘 하시겠죠. 누군가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도 덕분에 양평이형이 고유명사가 되면서 이제 여자 팬들도 '오빠'라고 안 하고 '형'이라고 하는데 섭섭하진 않나요?

특정 여자가 양평오빠라고 불러준다면 상관없어요. 저는 좋죠.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요.

-그래도 양평이형보다 양평오빠가 더 좋죠? (디시 이용자 '뭔말이여')

당연히 좋죠.

-그런데 왜 다른 성도 많은데 '김'이라는 성을 붙였나요?

김창완 선생님이 '나도 김인데, 형제 같은 사람이니 너도 김씨가 아닌가' 했어요. 처음에는 '하양평'도 있었고, '하세가와'가 한문으로 '장곡천'이라 '장양평'이 좋을까 했는데 김창완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셔서 '알겠습니다' 했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음악 스타일이나 목표가 있다면 궁금합니다. (디시 이용자 '콩')

자기가 하고 싶은 거를 그냥 해가는 거, 그게 뭐든 간에요. 펑크든, 사이키델릭이든, 뉴웨이브든 뭐든 간에 결과물을 봐서 '아 이건 하세가와 요헤이가 했던 거야'라는 걸 어떤 장르든, 어떤 순간에든 그걸 느끼게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긴 시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동영상 인사말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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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 '하세가와 씨라고 해야 하나', '김양평 씨라고 해야 하나', '양평이형이라고 해야' 하나 찬바람 맞으며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하세가와 씨, 양평 씨 막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양평이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모든 질문에 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신 덕분이다. 일 때문에 만난 것 같지 않은 편안함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장갤러들은 한 달 전 생일을 맞은 그에게 '식판'을 선물해줬다. 이제 그는 식판을 들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장기하와 얼굴들 멤버'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길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 알아보는 유명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가끔 장미여관 멤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몇몇은 지난 19년간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꾸준히 지켜온 음악이 코믹한 이미지에 가려지는 건 아닌가 우려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기타 색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기타 헤드에서 불꽃이 나가든 안 나가든, 그의 연주는 언제나 불꽃을 내뿜고 있다. 공기를 휘감는 그의 음악이 이제 영원한 봄을 알린다.

<사진 = 박유진 기자(zinpar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