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대만도 버렸는데···한국은 '나홀로' 탈원전

대만이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 선언을 철회했다. 지난 24일 국민투표에서 대만의 탈원전 정책이었던 전기사업법 조문(2025년까지 원전 중단) 폐지에 찬성하는 의견이 59.5%로 나오면서다. 대만 정부는 3개월 이내에 새 법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전. 오른쪽 원자로 건물이 영구정지된 고리 1호기다. [중앙포토]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전. 오른쪽 원자로 건물이 영구정지된 고리 1호기다. [중앙포토]

탈원전 ‘선배’인 대만을 상당수 벤치마킹해왔던 정부 입장에선 난감한 소식이다. ‘에너지 전형(轉型)정책’(대만)과 ‘에너지 전환계획’(한국)은 표현도 꼭 닮았다. 원전 전면 중단도 2025년(대만)과 2082년(한국)으로 시점이 다를 뿐 방향성은 일치했는데 앞서가던 대만이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버린 것이다.

현재 주요 원전 보유국의 에너지 운용정책은 크게 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①탈원전→원전 재가동 ②탈원전 속도 조절 ③원전 증가가 그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대만 외에도 일본이 있다. 일본 시코쿠(四國) 전력은 이카타(伊方) 원자력 발전소 3호기를 10월 재가동하기로 결정했다. 히로시마 고등 법원이 이카타 3호기의 운전을 멈춘 가처분 결정을 취소하면서다. 로이터통신은 “일본 전역에서 8기의 원전이 조용히 가동을 재개했다”고 보도했다. '원전 제로'를 선언했던 일본은 전체 원전 비중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늘릴 예정이다.

두 번째 사례는 벨기에다. 2025년까지 원전을 순차 종료키로 하고 국가 전력의 40%였던 원전 7기 중 6기를 중단한 벨기에는 올겨울 ‘대규모 정전(블랙아웃)’을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음 달 원전 2기 재가동을 추진하고 순환 정전(하루 3시간) 실시도 검토 중이다. 프랑스도 현재 75%인 원전 비중을 50%로 낮추는 목표 시점을 당초보다 10년 늦추기로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중국과 인도는 되레 원전을 늘리고 있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세계 신규 원전 59기 중 18기는 중국에 건설 중이다. 중국은 세계 원전 설비의 9%인 38기를 운영 중이다. 인도는 2027년까지 원전을 현재의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양국이 원전을 늘린 이유는 공기 오염은 줄이고 전력 수요는 만족하기 위해서다. 대기오염 물질을 유발하는 석탄 화력발전보다 원전이 낫다는 논리다.

우리 정부는 속도 조절 없이 ‘마이웨이’로 갈 방침이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26일 기자들과 만나 대만 탈원전 투표 결과가 우리 정책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그런 국민투표가 우리는 없기 때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에너지 전환계획은 70년에 걸친 의사결정”이라며 기존 계획을 고수할 입장임을 밝혔다. 재생에너지 3020 계획에 따르면 2082년엔 원전을 없애기로 했다. 원자력 비중은 현재 30.3%에서 2030년 23.9%로 낮춘다. 

문제는 국민 인식이 여전히 ‘원전 유지’ 에 기울어 있다는 점이다. 지난 19일 '제2차 2018 원자력발전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7명이 원전 ‘유지ㆍ확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정부는 산업부를 통해 ‘이해관계자(원자력학회)가 한 조사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조사는 한국갤럽이 의뢰 기관을 거론하지 않고 진행된 것이라 정부 반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원자력학회는 “가치 중립적 기관에 맡겨 학회·정부가 공동 여론조사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로썬 공동조사 계획이 없으며, 여론조사로 정책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발을 뺐다. 

한국에서 탈원전은 애초부터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독일·스위스 등은 수십년간 논쟁과 공론화를 거쳤고,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을 결정했다. 반면 우리는 국민적 합의보다는 정치적 선택 때문에 이뤄진 측면이 크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 여부는 공론화위원회까지 동원해 여론에 묻자더니 탈원전은 왜 공동조사를 못 한다는지 모르겠다”면서 “정권 초기 실시한 공론화위원회에서 청와대의 바람과 다른 결론(건설 재개)이 나온 이후 여론에 기대선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082년까지 원전 제로’나 ‘2022년까지 전기요금 인상 없다’ 등 특정 시점을 못 박은 게 정책 무리수라고 지적한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탈원전 명분을 쌓기 위해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는다면, 한전이 모든 적자를 떠안게 된다”면서 “발전 효율이 아직 낮은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원전 수입국인 대만과 달리 한국은 원전 수출국이며, 원전은 일자리와 관련된 중요 산업”이라면서 “해외에서 수주할 원전의 완공 시점까진 산업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 신한울 3·4호기는 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도 “한국은 대만보다 전력수요가 크고 화석연료 수입도 많다"며 "대만보다 한국의 탈원전 정책의 궤도 수정 필요성이 더 크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높은 원전 기술 수준과 수출 실적, 인재까지 있기 때문에 거액의 부지확보 비용과 설계비가 들어간 신규 원전을 백지화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사회적 갈등을 막기 위해 원전 업계를 함께 안고 가자는 의견도 있다. 일본의 경우 원전 재가동에 주민들이 찬성한 이유는 지역 예산 30%를 원전 교부금으로 보조해주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향토 기업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로이터 통신은 "1974년 이래 이카타는 1017억엔(1조원)의 원전 교부금을 받아 도로·학교·병원·소방서 등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이양수 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은 “아시아권에서 한국만 탈원전 국가로 남게 됐다”라면서 “대만처럼 국민이 직접 나서 막아야 탈원전 정책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며 현명한 정부라면 국가적 득실을 따져 과감하게 정책을 수정하는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논평했다.  

세종=서유진·장원석 기자 suh.yo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