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 막아낸 '두 번째 인천상륙작전' 비밀은 37명 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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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후퇴했다. 미 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아군 전력이 뒤지지 않음에도 계속 밀리고 있는 이유는 심리적 문제라고 보고 반격을 결심했다. 당시에 미국은 비공식 라인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 놓은 상황이었다. 만일 이를 공산군 측이 수락해 협상이 개시되었다면 오늘날 휴전선은 평택~삼척 사이에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던 공산군 측은 이를 거부했다.

개전 초에 대한해협 해전을 승리로 이끈 PC-701 백두산함.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맹활약했다. [사진: 해군]

개전 초에 대한해협 해전을 승리로 이끈 PC-701 백두산함.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맹활약했다. [사진: 해군]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만일 현 위치에서 50㎞ 후방의 금강까지 더 밀린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군할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의 사기 앙양 못지않게 일단 대한민국이 살아나려면 어떻게든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하지만 지난가을처럼 대대적인 북진은 이미 포기했고 일단 한강까지 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리지웨이는 오로지 군사적 관점으로만 서울을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포기하고 1.4 후퇴를 단행했을 만큼 서울은 방어에 불리한 위치여서 일단 전선을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는 곳까지만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부근에 미리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그는 지난해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렸다. 현재 전선이 구축된 북위 37도선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기 이전에 인천항을 먼저 탈환해 놓으면 상당히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1ㆍ4 후퇴 당시 한강 부교에서 전황을 살펴보는 리지웨이(왼쪽 첫번째)와 미 8군 참모부. 지리웨이는 일단 서울을 내주었지만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설 생각을 했다. [사진 미 육군]

1ㆍ4 후퇴 당시 한강 부교에서 전황을 살펴보는 리지웨이(왼쪽 첫번째)와 미 8군 참모부. 지리웨이는 일단 서울을 내주었지만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설 생각을 했다. [사진 미 육군]

 
당시 인천은 제해권이 없던 공산군 입장에서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전선 전체로 볼 때 서쪽의 외진 곳이어서 전력을 쪼개어 배치하기도, 그렇다고 방어를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아군에게 인천은 서울을 향한 최단 진격로이고 훌륭한 물류 거점이었다. 비록 1950년 가을에 있었던 제1차 인천상륙작전이 워낙 유명해서 1951년 겨울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2차 인천상륙작전 인천항 탈환 임무는 미 극동 해군 95기동부대에게 부여되었다. 사령관 앨런 스미스 제독은 한국 해군의 함덕창 대위에게 정찰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주둔 중인 공산군이 소수여서 국군 단독으로 인천항 탈환이 가능한 상황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덕적도에 배치된 해병대 1개 중대가 상륙군으로 결정되었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PC-701 백두산함과 YMS-301, 302, 306 소해정이 인근에 속속 도착했다.


작전 성공 후에 촬영된 기념사진. 소수의 인원으로 대단한 전과를 올린 숨겨진 승리의 주역들이다. [사진: 전쟁기념관]

작전 성공 후에 촬영된 기념사진. 소수의 인원으로 대단한 전과를 올린 숨겨진 승리의 주역들이다. [사진: 전쟁기념관]

 
국군은 2월 10일 저녁 만조 시간인 오후 6시에 상륙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작전 당일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악천후로 덕적도에 주둔한 해병대의 탑승이 지연되면서 물때에 맞춰 상륙은 불가능했다. 급보를 접한 백두산함 노명호 함장은 인천항에 접근한 각 함정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상륙부대를 급편했다. 그 결과 총 37명의 지원자로 구성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오전 7시에 경기만에 포진한 미 95기동부대의 지원 포격이 시작되었고 이 틈을 타 특공대가 조선기계제작소 부두(현 만석부두)에 상륙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김종기 소령은 각자 담당한 목표를 제압한 후 오후 9시까지 기상대 고지(현 자유공원)에 집합하라고 명령했다. 아군이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기만하기 위해 “제1대대 돌격 앞으로, 제2대대 돌격 앞으로”하는 식으로 소리 지르자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데 급급했다.

지난 2017년 11월 15일 월미도에 건립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사진 해군제공]

지난 2017년 11월 15일 월미도에 건립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사진 해군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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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오후 9시에 아군은 인천항을 감제 할 수 있는 기상대 고지를 확보하며, 전투는 막을 내렸다. 비록 규모가 작아 이후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전의 의의는 사뭇 남달랐다. 선더볼트 작전으로 명명된 반격 당시에 인천 서쪽 측면을 아군이 점령하고 있자 배후 차단을 두려워한 공산군이 응전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북쪽으로 물러났다. 한마디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작았지만, 어둠 속에 숨겨진 빛과 같았던 승리였다.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