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조선 가서 외국인 포로 상대하며 많이 배워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4>

우신취안은 중국지원군의 첫번째 공세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을 곤혹스럽게했다. 1982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우신취안은 중국지원군의 첫번째 공세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을 곤혹스럽게했다. 1982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신중국은 전문외교관이 없었다. 국민정부가 배출한 외교계 인재들이 널려있었지만 같은 편이 아니었다. 해외에 파견하면 망명할 가능성이 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팔로군(八路軍)이나 신사군(新四軍) 지휘관 출신 중에서 대사를 선발했다. 전쟁터라면 몰라도 외교와는 거리가 먼, 신임장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외교도 전쟁”이라며 나가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양복 입혀서 내보냈다. 속으로 투덜대며 나가는 사람이나 내보내는 사람이나 할 짓이 못됐다. 믿을 거라곤 두꺼운 얼굴과 배우 뺨치는 연기력이 다였다. 몇 사람 빼놓곤 다 그랬다. 국제무대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속 깊고 의심 많은 것이 큰 자산이었다. 꾸역꾸역해냈다. 외교를 총괄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차세대 외교관 양성이 절실했다. 6·25 전쟁이 단단히 한몫했다. 항미원조 지원군이 관리하던 외국인 포로수용소와 판문점을 외교관 양성소로 활용했다. 실습 장소로 그만한 곳이 없었다. 외국어에 능숙한 청년들을 포로 심문관이나 회담장 속기사로 파견했다. 문혁 이후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진 2세대 중국 외교관들의 회고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외국인 포로수용소가 있던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강계(江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판문점과 개성은 말할 것도 없다.

판문점도 중국 외교관 양성소로 활용

저우난은 걸출한 외교관이었다. 홍콩반환 문제로 영국과 22차례 열린 중영회담의 중국대표단 단장직도 15번 역임했다. 대처 수상과도 여러차례 회담했다. 1984년 2월, 홍콩 스텐리베이. [사진 김명호]

저우난은 걸출한 외교관이었다. 홍콩반환 문제로 영국과 22차례 열린 중영회담의 중국대표단 단장직도 15번 역임했다. 대처 수상과도 여러차례 회담했다. 1984년 2월, 홍콩 스텐리베이. [사진 김명호]

1954년 제네바 회담을 시작으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최고 수뇌부가 외국 원수 만날 때마다 등장하는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나 냉전 시절 미국과의 대사급 회담과 1971년 키신저의 중국 방문 때 중요한 역할 했던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의 외교 생애도 출발은 판문점이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푸산(浦山·포산)과 리커농(李克農·이극농) 사후 중국에서 비밀이 제일 많았던 천충징(陳忠經·진충경)도 청년 시절 개성과 판문점을 오갔다.

마지막 신화통신사(新華社) 홍콩지사 사장 저우난(周南·주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20대 초반에 지원군이 설립한 미군 포로 수용소 심문관이었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 신화통신사 홍콩 지사장은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중국의 해외 주재 외교관 중 서열이 제일 높았다. 통신사 지사장이었지만, 국내 직함은 중국 공산당 홍콩 마카오 서기였다. 흔히들 지하 총독이나 그림자 총독이라 불렀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이 상하이 시장 시절 가장 희망했던 자리가 신화사 홍콩 지사장이었다.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우관정(吳官正·오관정)도 한때는 부지사장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저우난의 전직은 외교부 부부장과 유엔 대표였다.

1950년 10월 19일, 국군 1사단과 미 기병 1사단이 평양을 점령했다. 그날 밤, 우신취안(吳信泉·오신천)이 지휘하는 지원군 39군도 단둥(丹東)과 장티엔(長旬) 하구에서 압록강을 도하했다. 예정된 지역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우신취안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성격도 유별났다. 무슨 전투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선봉에 서야 직성이 풀렸다. 장정 시절에도 그랬고, 항일전쟁 때도 그랬다. 마오쩌둥도 후한 점수를 줬다. “전쟁에 능하고, 전쟁이 뭔지를 안다. 상대를 방심시킨 후 기습을 가해 숨죽인 채 대기하던 아군 쪽으로 몰아버리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전 지역에 진입한 우신취안은 잠복에 들어갔다. 예하 부대에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야밤에 미군 보초 두 명 생포해서 따로 심문해라. 미군 위치 파악하면 보고해라.” 미군의 영변과 박천 도달을 확인한 우신취안은 운산을 포위했다. 11월 1일 17시 30분, 총공세를 퍼부었다. 11월 4일, 방어에 실패한 미 8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이동했다.

미 기병 1사단 8연대는 운산 전투에서 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미 기병 1사단은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시절 직접 창설한 기병대가 전신이었다. 160년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최정예 기계화(機械化)사단이 된 후에도 기병(騎兵) 1사단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자부심이 강하고, 화력도 굉장했다.

지원군 총부는 포로수용소 부지를 물색했다. 정치부 보안부장은 이름난 명풍(名風)의 후예였다.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의견을 냈다. “강계와 벽동이 적합하다.” 이유도 설명했다. “강계는 인심이 후하고 전쟁에 휩싸인 적이 없다. 주민들도 배타적이지 않다. 평안도 사람치고는 순한 편이다. 중국에 인접한 벽동군은 반도나 다름없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서쪽은 강과 산에 가로막혀 통행이 불가능하다. 북쪽만 육지로 이동이 가능하다. 차량 운행도 불편함이 없다. 일단 강계와 벽동지역에 분산 수용하자. 전쟁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면 벽동에 번듯한 수용소를 만들면 된다.”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정치부에서 파견한 통역들은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포로들과 오해가 그치지 않았다. 외교부에 통역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인도 공사 내정자가 정치공작대 인솔

중국지원군의 포로가 된 미 기병 1사단 병사들. 1950년 11월 중순, 평안북도 운산. [사진 김명호]

중국지원군의 포로가 된 미 기병 1사단 병사들. 1950년 11월 중순, 평안북도 운산. [사진 김명호]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외국어학원에 공문을 보냈다. “항미원조에 자원할 사람은 외교부에 신청해라.” 광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합동결혼식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 먹던 저우난은 흥분했다. 신부 귀에 속삭였다. “내일 당장 자원하자.” 신부도 동의했다. 다음날 새벽 신혼부부는 외교부 찾아가 자원서에 서명했다.

외교부는 외국어학원 영문과 학생 20명을 추려 정치공작대를 편성했다. 저우언라이가 인도 대사관 공사로 내정된 한니엔롱(韓念龍·한념룡)을 불렀다. “인도는 다음에 나가도 된다. 정치공작대 인솔해서 조선에 가라. 외국인 포로 상대하며 많이 배워라.”

정치공작대는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2007년 봄, 현직에서 은퇴한 저우난이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외교부 제 1부부장 리커농의 훈시가 인상적이었다. 2분도 걸리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내용이었다. “당과 마오 주석의 말만 들으면 된다. 경극 대사에 나오는 말처럼 아버지가 누구 때리라고 하면 때리고, 야단치라고 하면 야단치면 된다.” 6·25 전쟁 참전 초기, 중국은 이런 나라였다.

정치공작대는 압록강에 도달하기까지, 제 나라 땅에서도 많은 체험을 했다. 외국인 포로수용소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