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날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의 ‘잠정 타결’ 분위기를 띄웠다가 미측이 이에 반발하면서 한·미간 협상이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정부는 2일 외교수장간 통화를 통해 서둘러 봉합에 나섰으나 여기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협상 전망을 전하는데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교부는 이날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관련 고위급에서도 계속 협의해왔으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며 “협상이 조기에 타결되도록 계속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가 밝힌 고위급 협의 채널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설명에 따르면 결국 전날 정부 안팎에서 SMA 협상 타결이 임박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하루 만에 협상이 진통을 겪고 있음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기류는 이날 오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는 1일(현지시간) 본지에 “대한민국과 SMA 협상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 안팎에서 지난 1일 ‘잠정 타결’ 기류가 나왔는데 미측이 실제 발표를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한 본지 질의에 대한 공식 답변에서다.
이 고위 관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분담금 총액을 포함한 협상 결과를 승인하지 않았느냐’는 질의엔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우리 동맹국이들이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고,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기대를 해왔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양국 협상팀이 만든 분담금 총액 조율안에 아직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 발언이었다.
이런 보도 직후,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이날 “당장 (타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입장을 바꿨다. 전날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 발로 잇따라 ‘잠정 타결’ 보도가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하루 만에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다. 외교부도 마찬가지였다. 1일 오전엔 “(미국 측 답변을) 기다려보자”고 했다가 오후 들어서부터 이날까지 “현시점에서 알릴 사항이 없다”고만 했다.
특히 미국에선 전날 한국에서 ‘SMA 잠정 타결’ 보도가 나온 걸 두고 의아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워싱턴의 한 현지 소식통은 “한국 보도 직후 백악관과 국무부 등에 확인차 문의했지만, 타결이란 말을 듣지 못했다”며 “정부 내에서 '잠정 타결'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백악관의 입장도 확인했을 텐데 이상했다”고 소개했다.
분담금 총액과 관련해 기존(1조389억원)보다 10% 안팎 인상 전망에 대해선 더욱 민감했다. 이와 관련,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한국에서 왜 이런 보도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총액과 관련해 이견이 아직 남았는데, 한국에서 합의된 것처럼 보도가 나오는 건 문제”라고 언급했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잠정 타결’이라는데 이날 백악관과 국무부, 심지어 주한 미국대사관까지 “그 단계는 아니다”라고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우선 정부가 ‘트럼프 리스크’를 간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 통화 이후 분담금 협상이 급진전하자 섣부르게 ‘잠정 타결’ 전망을 내놓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단순히 최종 합의문 조율만 남았다면 시간 문제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총액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라면 한국 측이 좀 성급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총액 인상률을 거부하면 언제든지 협상을 다시 해야 할 상황인데 이럴 경우 이번 해프닝이 향후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제10차 SMA 협상 당시에도 실무진이 합의한 총액을 수차례 비토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정상 간 통화 내용까지 언급하면서 앞서 나가는 언급을 한 것에 내심 불만이 클 것이고, 이는 향후 협상을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측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1일부터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4000명 이상이 사상 초유의 무급휴직중인 상황이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북한이 최근 잇따라 단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는 가운데 주한미군 전력에 차질을 빚는 상황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일각에선 정부가 4·15 총선을 의식해서 분담금 협상 타결을 서둘러 홍보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물론 역으로 ‘트럼프 변수’를 감안할 때 갑자기 기류가 또다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날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도 협상이 끝날 때까지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려 한다. 미국 측 반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이후 미국이 분담금 총액 요구액을 상당 정도 낮춰 협상이 80~90%까지 온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한편 정부 수석대표인 정은보 SMA 대사와 제임스 드하트 미 국무부 협상대표는 전화통화와 화상회의를 수시로 하면서 최종 조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서울=백민정·이유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