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스파르타 300···승패 결정하는 건 병력이 아니다

레오니다스와 300 용사의 분투를 묘사한 크루이 다비드의 작품. 오늘날 이들의 전과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지만 역사에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 he Gallery Collection]

레오니다스와 300 용사의 분투를 묘사한 크루이 다비드의 작품. 오늘날 이들의 전과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지만 역사에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 he Gallery Collection]

 
기원전 480년, 만반의 준비를 마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됐다. 모든 곳을 막을 수 없었던 그리스는 고심 끝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퇴하는 데 전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동안 페르시아 육군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해야 했는데 워낙 양측의 전력 격차가 컸다. 그래서 테르모필레 고개를 방어막으로 삼아 최대한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협곡에 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이곳 공략에 투입된 페르시아군은 기록에 100만이라고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그리스군의 5배 정도인 3만 5000여 명으로 추산한다. 그래도 그리스의 절대 열세였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서 그리스군은 사흘간 페르시아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축차 투입할 수밖에 없는 좁은 험로를 방어에 이용한 결과였다.

1940년 독불전쟁 당시 포로가 된 프랑스군. 프랑스는 불과 6주 만에 항전을 포기했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때문에 제3사단의 스톤 전투 무공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1940년 독불전쟁 당시 포로가 된 프랑스군. 프랑스는 불과 6주 만에 항전을 포기했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때문에 제3사단의 스톤 전투 무공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변절자가 알려준 우회로로 돌파한 페르시아군이 배후를 차단하면서 그리스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에 대부분은 퇴각했으나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병은 바다에서의 승리가 확인될 때까지 현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두고두고 회자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고 협곡은 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일주일간 적을 막아냈지만 결국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의 희생은 그리스인들에게 용기를 안겨줬고, 덕분에 끝까지 싸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서양에서 ‘300’은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히틀러가 ‘300 용사’를 들먹이며 고립된 독일 제6군에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최후를 맞으라고 강요했을 정도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히틀러는 300 용사를 들먹이며 죽기 전까지 싸우라고 강요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히틀러는 300 용사를 들먹이며 죽기 전까지 싸우라고 강요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처럼 먼 과거에나, 또는 신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는 전쟁사에서 의의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5월 15일부터 프랑스 스톤(Stonne)에서 벌어진 격전도 그 사례 중 하나다. 당시 독불전쟁은 불과 6주 만에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났다. 공군의 엄호 하에 진격해 온 독일의 기갑부대가 순식간 배후를 차단하자 프랑스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료에서 당시의 프랑스군을 무능의 대명사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스톤 전투에서 프랑스 제3사단은 3배나 많은 독일 제14 장갑군단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세당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놓고 3일간 벌어진 전투는 무려 17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했다. 길목을 막고 나선 프랑스 전차 2대가 무려 13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스톤 전투 당시 활약한 프랑스 제3사단 소속 샤르 B1 전차. 전쟁 전체로 보자면 그저 그런 성능이었지만 제2차 대전 발발 초기에는 독일의 전차들을 압도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스톤 전투 당시 활약한 프랑스 제3사단 소속 샤르 B1 전차. 전쟁 전체로 보자면 그저 그런 성능이었지만 제2차 대전 발발 초기에는 독일의 전차들을 압도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실 전차의 성능만 놓고 본다면 프랑스군이 결코 꿇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제3사단처럼 자신감을 갖고 끈질기게 싸웠던 부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배후에 갑자기 등장한 독일군에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기 바빴다. 이처럼 당시 여타 프랑스군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는 와중에도 제3사단은 독일의 정예인 제14장갑군단에게 큰 피해를 안기며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방의 세당이 피탈되자 제3사단은 후퇴해야 했고, 그렇게 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리스가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300은 전설이 되었지만 제3사단의 분투는 프랑스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분투 또한 소수가 다수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던 훌륭한 사례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모두가 도망치고 항복하기 바빴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