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멤버 현영민, 김병지, 최진철, 이천수(왼쪽부터)가 새해부터 파주 NFC에 모였다. 올해는 한일 월드컵 20주년이 되는 해다. 김현동 기자
한국 축구의 황금기를 활짝 열어젖힌 4강 신화의 주역 김병지(52·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최진철(51), 현영민(43·울산 현대고 감독), 이천수(41·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를 11일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만났다. 파주 NFC는 '4강 신화'의 출발점이 된 뜻깊은 장소다. 히딩크호는 월드컵을 앞두고 약 1년간 이곳에서 합숙 훈련했다.

이천수, 현영민, 최진철, 김병지(왼쪽부터)는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전환점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김현동 기자
한참 동안 말없이 훈련장을 바라보던 김병지가 말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어떤 경기였느냐"고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4명은 입을 모아 조별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2-0승)을 꼽았다. 한국이 첫 승을 거둔 경기였다. 홍명보(53), 김태영(52)과 '철벽 스리백'을 구축하며 4강까지 전 경기(6경기)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수비수 최진철은 "폴란드와 첫 경기에 나서는데 너무 긴장돼 다리가 후들거렸다. '실수라도 하면 내 축구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에 '축구공아, 제발 나에게 오지 마라'는 생각도 했다. 팬들은 아마 그런 압박감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당시 21세로 당돌한 막내였던 이천수도 "같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후반 교체 투입됐는데 골을 넣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척 컸다. 스코어만 보면 경기가 술술 풀린 것 같지만,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고 회고했다. 골키퍼 김병지는 역사적인 폴란드전에 나서지 못했다. 그는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2001년 파라과이전에서 하프라인까지 공을 치고 나갔다가 상대 공격수에게 뺏겼다. 실점은 면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곧바로 그를 뺐다. 스타 골키퍼였던 그는 이듬해 월드컵에서 세 살 아래 이운재에 밀려 벤치를 지켰다. 김병지는 "실수는 인정한다. 그래도 히딩크 감독님이 미웠다. 4강까진 제외한다 해도 3위 결정전에선 기회를 줄 만도 했다"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또 드리블을 할 것이다. 대신 더 잘해서 이번엔 공을 뺏기지 않을 것"이라며 농담했다.
![8강전에서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고 기뻐하는 태극전사들. 한국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축구 변방에서 벗어났다.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1/13/dfac5cfb-f286-4b57-867b-10dc28405b80.jpg)
8강전에서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고 기뻐하는 태극전사들. 한국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축구 변방에서 벗어났다. [연합뉴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한국 축구의 전환점이자 이정표가 됐다. 그동안 세계 축구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은 월드컵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유럽 무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다.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송종국, 현영민 등이 유럽 리그를 잇달아 밟았다. 2003년 한국인 최초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레알 소시에다드)에 진출한 이천수는 "월드컵을 통해 '한국은 유럽 축구를 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깼다. 유럽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이때부터 목표는 K리그를 넘어 유럽 빅리그가 됐다"고 밝혔다. 현영민은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 인프라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공포의 삑삑이(20m 셔틀런) 훈련'과 비디오 분석, 피지컬 트레이닝 등 체계적 시스템이 정착한 원년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2002년 월드컵 4강까지, 전 경기 출전한 최진철과 이천수. 벤치에서 응원한 김병지와 현영민, 넷은 모두 레전드로 불릴 만하다. 김현동 기자
한국 축구는 올해 다시 한번 '월드컵 신화'에 도전한다. 11월 개막하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기다리고 있다. 손흥민(30·토트넘), 황희찬(26·울버햄튼), 김민재(26·페네르바체) 등은 2002년 멤버인 황선홍(54), 홍명보, 박지성(41) 등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다. 이천수는 "유럽에서도 최고 공격수로 꼽히는 흥민이가 이끄는 한국은 더는 기적을 바라는 팀이 아니다. 경험과 실력을 두루 갖춘 선수들이 많다. 카타르에서 흥민이를 비롯한 후배들이 다시 한번 4강 진출 신화를 이뤄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병지는 "이번엔 후배들이 사고를 칠 것만 같다. 흥민아, 어게인 2002년을 부탁한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주=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