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 조선 성종때 시조에 등장

충남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중앙포토
책 집필에는 성정용 충북대 교수와 권오영 서울대 교수, 정재윤 공주대 교수, 김낙중 전북대 교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등 국내 백제사 전문가 40명이 참여했다. 부여군은 4억 원을 들여 2020년 1월부터 집필 작업을 해왔다. 부여군 관계자는 “왜곡된 백제사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 데 이들 책이 도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못된 역사의 대표적 사례는 삼천궁녀다. 삼천궁녀는 조선 성종 때 문인(文人)인 김흔의 시조에 처음 언급된다. 김흔은 시조에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표현했다. 명종 때 문신인 민제인도 '백마강부'란 시조에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라고 썼다.
반면 조선 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낙화암, 삼천궁녀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삼천’은 ‘많다’는 뜻으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단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며 “시적 수사로 표현된 허구임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백마강 조룡대 전설도 사실 근거 약해"

부여군 백마강(금강) 낙화암 옆모습. 중앙포토
부여군 관계자는 “백제의 번창과 강력한 수호를 상징하는 용이 패망의 증거물로 잘못 사용된 것 같다”며 “승자가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내세우고, 유민들의 백제 재건에 대한 의지를 꺾기 위한 상징·조작 측면이 강해 보인다”고 했다.
백마강 '낙화암(落花巖)'이란 명칭도 고려 때 역사책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한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출간됐다. 조선 시대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낙화암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의자왕은 대담하며 결단력 있어"
부여군 관계자는 “의자왕이 방탕한 폭군이었다면 백제부흥운동에 3만여명이 호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패망한 나라의 군주라는 이유로 부정적 이미지가 덧칠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부여 백마강 조룡대.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