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도 채 남지 않은 대선판을 연일 강타하고 있는 이슈다. 여야 곳곳에선 “네거티브 공방을 넘어 관음증 대결로 추락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쏟아진다.
이를 두고 정가 일각에선 “30년 전 부산의 한 음식점에서 벌어진 도청사건이 떠오른다”는 말도 나온다. 제14대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벌어진 ‘초원복국 사건’이다.
D-7일 터진 도청사건…대선 정국 강타
![1992년 12월 11일 부산 기관장 모임을 했던 부산 남구 초원복국에서 도청 사건이 벌어지자 이후 경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1/23/5cc22b42-ad30-442f-9739-91ea2323dd04.jpg)
1992년 12월 11일 부산 기관장 모임을 했던 부산 남구 초원복국에서 도청 사건이 벌어지자 이후 경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초원복국에는 두 달 전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김기춘 전 장관을 비롯해 부산시장과 부산지검장, 부산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부산교육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참석했다.
![부산기관장모임사건이 일어났던 부산 초원복국.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1/23/593e4549-5f5f-4ac8-916e-37b8dbb9780a.jpg)
부산기관장모임사건이 일어났던 부산 초원복국. [중앙포토]
이런 발언은 국민당 부산지역 선거대책본부 관계자인 문모씨가 설치한 도청장치에 고스란히 담겼다. 문씨는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에게 기관장 모임 제보를 받고 하루 전인 12월 10일 초원복국의 장롱과 창틀 두 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당시 국민당은 대선 판도를 뒤엎을 요량으로 도청한 녹음 파일을 나흘 뒤인 12월 15일 공개했지만 결국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초원복국 “가족 온갖 협박 당해”

초원복국에서 선보이는 복불고기와 복국. 이은지 기자
김 대표는 “도청사건인 줄 몰랐는데…. 우리도 선의의 피해자였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때는 선거기간이어서 그랬는지 많은 손님이 전화해서 욕설을 퍼붓고, 자식들 몰살시키겠다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을 해치겠다는 말까지 나와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호의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김 대표는 ”관광객들이 버스 편으로 와서 기념되는 것은 다 가져갔다. 초원이라는 글자만 보이면 성냥통이든 뭐든 다 가져갔다”며 “서울뿐 아니라 시외에서 많은 손님이 왔다”고 말했다.
이후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복국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초원복국이 복국을 대중화한 일등공신”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다.
김 대표가 복국집을 열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김 대표는 아버지 가게를 잠시 관리하다 복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작고한 김 대표의 부친은 1960년부터 부산에서 일식집을 운영해왔다. 김 대표의 아내 백경희(60)씨는 “시아버지께서 일식집은 사양길로 접어드니깐 한 가지 메뉴만 특화해서 해보라고 권유했다”며 “그래서 복국집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선거 끝나자 반전…“기념되는 것 다 가져가”

초원복국에서 선보이는 복수육. 이은지 기자
초원복국의 대표 메뉴는 복불고기를 비롯해 복찜, 복수육 등이다. 김 대표는 인터뷰 중에도 복수육과 복불고기 주문이 들어오자 곧바로 요리에 들어갔다. 그는 다시마, 무, 파 딱 세 가지 재료만으로 우려낸 국물을 이용해 재빠르게 복을 삶아냈다. 그리고 비법의 장으로 만든 불고기 양념과 찜 재료에 복을 넣자 두 가지 요리가 한 번에 뚝딱 완성했다.
부산시, 2002년 부산 향토음식 지정·육성

복지리. 사진 부산시
부산시 관계자는 “부산은 타지역보다 복어 원물의 유통량이 풍부해 복요리 전문점이 많다”며 “복어를 안전하게 조리할 수 있는 제독 기술도 뛰어나 기호도와 레시피 측면에서 타지역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캐비아·트뤼프 등과 ‘세계 4대 진미’

복어. 사진 중앙포토
복어를 국내에서 식용으로 사용한 시기는 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서기 100년경 후한대의 『설문해자(說文解字)』와 조선시대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기록돼 있다. 한반도의 복어 조리기술은 훗날 일본인에 전수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