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연승 뒤 기뻐하는 한화 선수들. 사진 한화 이글스
그런데도 한화 더그아웃은 늘 차분하다. 손혁 한화 단장은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끝까지 완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전히 경기 중 부상 선수가 나올까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라며 "감독님께서 연승 기간에도 선수들이 너무 들뜨지 않도록 분위기를 잘 잡아주신다"고 공을 돌렸다.
◇김경문 리더십
올해는 한화가 오래 품어온 '원기옥'을 터트리는 시즌이다. 한화는 오랜 기간 최하위권에 머물면서 매년 리그 최정상급 유망주 투수들을 끌어모았다. 2021년 8월 1차 지명한 광주 진흥고 투수 문동주가 대표적이다. 광주는 KIA 타이거즈의 연고 지역이지만, 한화는 전년도 최하위 팀 자격으로 '전국구 1차 지명권'을 얻었다. KIA가 그해 '야수 최대어' 김도영을 데려가자 한화는 망설임 없이 문동주를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전면 드래프트가 부활한 이듬해에는 또다시 최하위의 '특권'을 활용해 서울고 투수 김서현을 전체 1순위로 지명했다. 이후에도 장충고 투수 황준서(전체 1순위), 전주고 투수 정우주(전체 2순위)를 잇달아 데려왔다. 이들 중 4년 차 선발 문동주, 3년 차 마무리 김서현, 1년 차 불펜 정우주가 모두 올해의 연승 행진에 힘을 보탠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11일 고척 키움전에서 12연승을 달성한 뒤 팬들에게 인사하는 한화 김경문 감독. 뉴스1
김 감독은 스프링캠프와 더그아웃에서 선수를 오래 지켜보고, 한 번 주전으로 선택한 선수에게는 꾸준히 기회를 준다. 시즌 초반 한화가 팀 타율 1할대 부진에 허덕이며 하위권을 맴돌 때도 노시환, 채은성, 김태연 등 주축 타자들을 향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반등에 성공해 공격의 핵심축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시행착오는 곧바로 바로잡고, 변화가 필요한 시점엔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도 여전하다. 김 감독은 지난 시즌 주요 전력이 아니었던 문현빈을 올해 중심타자로 중용하면서 "작년엔 내가 시즌 도중에 팀에 와서 시야가 좁았다. 마무리 캠프에서 문현빈을 다시 봤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또 마무리 투수였던 주현상이 개막 직후 흔들리자 3경기 만에 교체를 결심했다. 입단 후 2년간 좌충우돌하던 강속구 투수 김서현에게 "네 구위를 믿는다"며 새 소방수 역할을 맡겼다. 김서현은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는데도 벌써 12세이브를 올려 이 부문 선두에 올라 있다. 김서현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에 감독님과 양상문 투수코치님이 오셔서 내게 많은 기회를 주셨다"며 "그만큼 더 열심히 던져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고 털어놨다.

한화 폰세.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 와이스(왼쪽)와 노시환.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는 오랜 기간 외국인 투수 복이 없었다. 지난 5년간 펠릭스 페냐·리카르도 산체스·닉 킹험·라이언 카펜터·워윅 서폴드·채드 벨 등이 한화를 거쳐 갔지만, 누구도 리그를 압도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23년엔 에이스 역할을 기대했던 버치 스미스가 단 한 경기만 던지고 부상으로 한국을 떠나는 불운까지 겪었다.
올해는 다르다. 외국인 투수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가 10개 구단 최고의 원투펀치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폰세는 9경기에서 59이닝을 던져 7승 무패, 평균자책점 1.68을 기록하고 있다. 탈삼진(75개)은 전체 1위, 다승·평균자책점·투구이닝은 2위다. 명투수 출신인 이강철 KT 위즈 감독은 "폰세 같은 투수가 왜 벌써 한국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둘렀고, 김 감독도 "1선발로 나무랄 데가 없다"고 흐뭇해했다.
지난 시즌 중반 대체 외국인 투수로 한국에 온 와이스도 9경기에서 6승 1패, 평균자책점 3.36을 기록하면서 제 몫을 하고 있다. 심지어 폰세와 와이스는 둘 다 시속 150㎞대 중후반의 강속구를 던진다. 올 시즌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투구 3자책점 이하)를 7번씩 해내 나란히 공동 2위에 올라 있다.
폰세의 통역으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고 있는 김지환 씨는 "폰세는 외국인 선수지만, 팀 젊은 투수들에게는 리더 역할도 해내고 있다"며 "더그아웃에서는 활발해 보이는데, 전력분석 미팅이나 경기 때 상대 타자들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진지하다. 놀 땐 놀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화 류현진.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 문동주. 사진 한화 이글스
김 씨는 "폰세와 와이스에게 류현진 선수는 그저 '우상'이다. 뭐든 류현진 선수가 하자는 대로 하고, 루틴도 다 따라 하려고 한다"며 "심지어 야구장에 나왔을 때 어떤 색의 유니폼을 입어야 할지 헷갈리면, 둘 다 류현진 선수만 쳐다본다. 류 선수가 입는 유니폼을 보고 '아, 저거구나' 하며 따라서 입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양상문 한화 투수코치는 "선발들끼리 서로 선의의 경쟁이 붙으면서 확실히 시너지가 난다"며 "다들 '연승을 내가 끊기는 싫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선다.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부담감'을 선발 투수 전체가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한화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은 김서현. 뉴스1

한화 채은성.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 마운드의 힘은 올해 팀이 승승장구하는 1순위 비결로 꼽힌다. 그러나 양 코치는 "투수만 잘한다고 팀이 잘 나가는 건 아니다.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코치가 꼽은 숨은 공신은 포수 최재훈·이재원과 유격수 심우준이다.
실제로 한화 신인 정우주가 흔들릴 때 포수 최재훈이 마운드로 올라가 "너 새가슴이야? 맞으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냥 한가운데로 던져"라고 기운을 북돋우는 장면은 야구팬 사이에 큰 화제를 모았다. 와이스는 지난 11일 키움 히어로즈전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최고 피칭을 한 뒤 "포수 이재원의 사인에 고개를 흔든 게 (93구 중) 1~2개밖에 없었다"고 고마워했다.
최재훈은 이와 관련해 "전력분석팀이 정말 많이 도와주고 있다. 늘 상황에 따라 상세한 피드백을 많이 줘서 투수들과 야수들 모두 경기 때 힘을 낼 수 있다"고 공을 돌렸다. 그는 또 "젊은 투수들에게는 늘 '볼넷을 주지 말고 차라리 홈런을 맞으라'고 한다. 자신감 없이 피해 가는 것보단 그게 그 선수들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한 심우준은 수비와 주루에서 일당백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양 코치는 "결정적일 때 심우준이 있으면 (웬만한 땅볼 타구는) 다 더블플레이로 이어진다"며 "위기를 맞을 상황에서 흐름을 끊어주니, 투수들 호흡도 돌아오고 여유가 생긴다. 수비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화 심우준.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 최재훈. 사진 한화 이글스
한화는 선수층이 그리 두껍지 않다. 그런데도 팀 운영에 큰 문제가 없는 건, 부상으로 이탈한 선수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다. 올 시즌 개막 전 구상한 선발 로테이션에서 중도 부상자가 한 명도 없는 팀은 한화가 유일하다. 야수들도 마찬가지다. 올해 한화의 개막전 선발 라인업 중 부상으로 이탈한 선수는 손목을 다친 안치홍뿐이다. 큰 부상은 아닌데, 타격 슬럼프가 겹쳐 회복 시간이 필요해진 경우다.
한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큰 부상이 아니면 무조건 경기에 나간다"는 의지를 갖고 뛴다. 이지풍 한화 트레이닝 코치는 "선수가 아플 때 선택지는 두 가지다. 당분간 쉬고 1군 엔트리에서 빠지거나, 가능한 한 경기에 나가고 결과는 (트레이닝 코치인) 내가 책임지는 것"이라며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고 설명했다. 코치와 선수가 서로를 신뢰하기에 가능한 결과다.
이 코치는 "선수가 아프다고 했을 때, '지금 이 경기가 한국시리즈 7차전이라 해도 빠지겠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뛴다'고 한다"며 "그럴 때 대타든, 지명타자든, 하루 이틀 휴식이든 그 부상 상태에 맞는 대안을 함께 고민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했다.
최종 결정권자인 김 감독은 이 코치와 선수들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인다. 이 코치는 "감독님께서 소통을 잘 해주시고, 의견을 존중해주시기에 가능한 일"이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