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담벼락, 눈 맞은 소년들 내달리다

경찰이 넘긴 아동 등 수용자가 형제복지원에서 하차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이들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감금돼 구타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부산 형제복지원생들이었다. 피해자 김세근(60)씨는 “탈출 당시는 해방감보다 누가 쫓아오지 않을까 더 두려웠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야 김해까지 도망쳤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은 1960~1980년대 부랑아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을 강제 구금한 후 가혹행위를 한 곳이다. 1971년부터 1982년까지 11년간 수용됐던 김씨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2020년 부산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만8000여명이 감금됐고, 최소 523명이 숨졌다.
이 사건은 김씨 탈출 후 4년여 뒤인 1987년 3월 원생 30여명이 집단 탈출하던 중 1명이 구타당해 숨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정권의 비호 아래 다시 묻히는 듯했던 사건은 2018년 피해자들의 신상기록카드가 처음 공개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검찰이 인권침해 실상을 규명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경찰이 인계한 아동 등 수용자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10살 아이들이 10시간씩 돌 날랐다”
김씨도 탈출 당시 무너졌던 담벼락 위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는 "당시 도망쳤던 12명 가운데 '고문관'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친구 등 일부는 다시 끌려갔다"며 "누군가 잡으러 올 거란 공포가 너무나 컸다. 오랜 기간 다른 사람 얼굴을 쳐다보지도, 제대로 대화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형제복지원 측은 당시 감시·추적 역할도 편을 갈라 원생에게 맡겼다. 김씨는 "도망치다 잡힌 사람들은 피떡이 되게 맞았다"고 했다. 또 '나는 도망가다 잡혔습니다'라는 글자가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 식당에 세워두고, "이놈 탓에 너희가 맞는 것"이라고 윽박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몸서리쳤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이 돌을 날라 담장을 쌓고 있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나는 도망가다 잡혔습니다’ 혹독한 매질
김씨와 함께 복지원 생활을 한 하씨는 5살 무렵 바구니에 담긴 채로 부산역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경찰 손을 거쳐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져 15년간 감금생활을 했다.
현재 이 사건은 진실·화해를위반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1년간의 첫 진상조사를 벌인 결과 이르면 다음 달 첫 보고서가 나온다. 김씨와 하씨 모두 진화위 조사를 받았으며, 기록이 분명해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피해자 지위 등 '명예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곧장 배·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계된 수용자 승차 장면.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다음달 조사 보고서…“배·보상은 기약 없어”
하지만 상당수 피해자는 "이마저도 반쪽 조처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우여곡절 끝에 20대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배·보상 관련 내용이 누락돼서다. 진화위 조사에서 피해자로 인정받더라도 이는 명예회복 수준일 뿐 실질적인 배·보상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피해자들의 입장이다.

서울 쪽방촌에서 빙초산을 음독한 이춘석씨. 형제복지원 부산피해자협의회
35년 전 끔찍한 기억, 아직 현재진행형
견디다 못한 형제복지원 부산피해자협의회 40여명은 지난 3월 30일 부산 자갈치 일대에서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가두행진을 했다. 박경보 협의회 집행위원은 "대부분 신체·정신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고, 고령자의 경우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배경을 밝혔다. 또 다른 피해자 단체인 생존자유가족모임 측은 “피해자 조사를 먼저 진행한 뒤 배·보상 문제를 협의하는 게 합당하다”는 입장이다.

형제복지원을 보육 시설로 알고 방문한 외국인. 부산시
세월·기록에 조사 한계…"지자체 지원" 지적도
형제복지원 자료를 발굴해 사건을 재조명하는 데 일조한 부산사회복지연대 김경일 사무국장은 "국가 배·보상 이전에 피해자가 거주하는 지자체 조례를 통해 최소한의 의료비 지원 등 방안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