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한달 만에 다시 1280원대…“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다”

13일 오후 1시30분 기획재정부는 예정에 없던 긴급 거시경제금융 점검회의를 소집했다. “각별한 경계감을 가지고 금융·외환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해 달라. 필요시 관계기관 공조하에 즉시 시장 안정조치를 가동하겠다.” 회의를 주재한 방기선 기재부 제1차관의 발언 수위는 높았다. 장 마감을 불과 한두 시간 앞두고 정부가 구두 개입에 나서야 할 만큼 이날 시장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국에서 밀려온 고물가 쇼크가 한국 시장을 뒤흔들었다. 주식·국채·원화가치 모두 바닥으로 급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블랙 먼데이’였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당 원화가치는 하루 사이 15.1원 하락(환율은 상승)하며 1284원으로 마감했다. 지난달 16일 이후 한 달 만에 1280원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장중 한때 1288.9원까지 추락하며 1290원 선을 위협할 만큼 외환시장은 종일 불안하게 움직였다. 원화 값이 1300원대로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장에 팽배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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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 효과는 채 한 달도 가지 않았다.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만나 “외환시장 협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내면서 들끓던 외환시장이 안정을 찾았던 것도 잠시였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금융시장을 혼돈으로 내몬 ‘신호탄’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노동통계국이 공개한 소비자물가지수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대비 8.6%로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 등 긴축 고삐를 더 강하게 죌 것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김영환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은행이 연말까지 네 번의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한다 하더라도 한·미 기준금리 역전은 불가피해 보이며, Fed가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한다면 역전 폭은 상당히 커질 수 있다”며 “이런 우려로 원화가치가 하락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채권시장도 비상이었다. 이날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0.239%포인트 상승(채권값은 하락)한 연 3.514%로 거래를 마쳤다. 2012년 4월 이후 10년여 만에 3.5% 선을 뛰어넘었다.


문제는 최악이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이달 미국 시카코대 부스비즈니스스쿨과 공동으로 미국 경제학자 49명 대상 설문조사를 했더니 응답자의 70%가 내년 또는 이전에 미국이 경기 침체에 빠지겠다고 예상했다. 38%는 내년 상반기를 침체 시기로 지목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 체력(펀더멘털)은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다. 경제위기 때마다 버팀목 역할을 했던 수출에서 이상 신호가 뚜렷하다. 재정수지와 무역수지(또는 경상수지)가 동시에 적자를 기록하는 ‘쌍둥이 적자’가 올해 나타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날 관세청에 따르면 올 들어 10일까지 누적 무역적자만 138억2200만 달러(약 17조8000억원)에 이른다. 국제 원자재가 상승 여파로 수입액이 가파르게 늘면서 적자가 불고 있다. 지난달 30일 산업연구원은 올해 연간 무역수지를 158억 달러 적자로 예상하기도 했다. 기재부 전망에 따르면 올해 재정수지는 적자 ‘예약’이다. 사회보장성 기금을 제외한 관리재정수지는 연말 110조8000억원에 이를 예정이다.

물가는 물론 수출, 재정, 성장 등 여러 경제지표가 2008년 금융위기 또는 1998년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최악의 상황을 곧 맞닥뜨릴 수 있다는 쪽을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