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당역 살해 사건 뒤에 만난 이원석 검찰총장(왼쪽)과 윤희근 경찰청장. 오른쪽은 신당역 앞에 놓인 글귀와 꽃. 그래픽=신재민 기자
피해자는 자신에게 다가온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치를 했다. 그러나 범죄는 국가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틈새를 파고들었다. 첫째 틈새는 구속영장 청구 기각이었다. 가해자가 구속됐다면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피의자 내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주거가 불명하거나 증거 인멸 또는 도주 우려가 있을 때 구속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보복 범죄 내지 스토킹 범죄에서는 피해자 보호에 취약하다. 구속이 되면 신체의 자유가 직접적으로 제한되고, 적절하게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유죄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영장 청구와 발부는 엄격하고 신중하게 진행돼야 한다. 이런 원칙은 존중하지만 스토킹 범죄나 보복 범죄에서는 피해자 보호가 특히 중요하다는 점을 법원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가해자가 나름의 사회적 신분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영장 발부 여부에 고려되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청년단체 관계자들이 19일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일어난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스토킹 범죄 대응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연합뉴스
우선 스토킹 개념이 너무 협소하게 정의됐다. 스토킹 행위의 주요 표지인 지속성 또는 반복성이라는 요건이 모호하기도 하다. 스토킹 범죄의 특성 상 피해자의 범위를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 및 동료로 확대해서 적용 및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 온라인에서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유포하는 행위는 스토킹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파급력과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을 고려하면 정보통신망 상에서 피해자의 사진과 음성 등을 배포 또는 게시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에서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반의사불벌 조항이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비로소 검찰이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려는 취지가 무색하게 이 조항은 초기에 수사기관이 개입하여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가해자가 합의를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2차 스토킹 범죄나 더 나아가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보복 범죄를 저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개 스토킹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개인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2차 스토킹 범죄 내지 보복 범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다. 이번 신당역 사건은 이 조항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의사불벌 조항을 하루빨리 없애야 할 이유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신당역 역무원 피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힌 것과 관련해 19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진보당, 녹색당, 전국여성연대, 불꽃페미액션 관계자들이 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스토킹 범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빈번하지만 그 외의 다른 관계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혐오 범죄라는 프레임은 이 사건의 본질과 문제의 심각성을 온전히 포착해내지 못한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환원하면 범죄자 개인의 책임이 희석될 뿐만 아니라, 사안을 분석하고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피해자는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를 구하지 못했지만, 미래의 희생자를 줄이는 것이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호소에 응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