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관영매체인 글로벌 타임즈는 29일(현지시간) 칼럼을 통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한국은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경제 전망은 극도로 걱정스러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블룸버그가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마이크론 공백을 이용해 중국 내 점유율을 늘리는 것을 장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한 지 하루 만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이 불편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면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노출도가 크기 때문에 미국에서 오는 모든 압박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도 진단했다.
외신들의 시끌벅적한 반응에 한국 반도체 업계는 난감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식 입장은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 반도체의 주요 수출국이어서다. 29일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중 당국자들의 발언과 관련 추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며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SK하이닉스 측 역시 비슷한 입장이었다.
한국 정부도 이 사안과 관련 "개별 기업의 선택에 관여하기 어렵다"는 선에서만 언급 중이다. 참고로 한국은행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수출과 관련해 스마트폰용, 서버용, PC용 등 모두 미국과 중국의 수요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수요가 가장 많은 스마트폰용의 경우 미국 수요가 9.1%, 중국 수요는 9.0%로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한국 정부는 최근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라 생산 제한을 받게 될 중국 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생산시설에 대해 반도체 생산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마이크론의 빈자리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메모리 반도체의 특성상 그 빈자리도 자연스럽게 메워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메모리 반도체는 업체별로 특정한 것이 아니고 똑같은 범용 제품이라 시장에서는 구분 없이 팔릴 수 있기에 한 회사의 빈자리를 채우지 말라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현재 다운턴(down turn) 상황과 마이크론의 중국 점유율을 고려할 때 빈 공간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 실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로 우회 수출이 늘어나는 것처럼 중국 쪽이 제3국을 거쳐서 한국 기업의 물량을 사가는 수도 있다”라며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중국 쪽으로 물량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채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전략적인 침묵을 지키는 게 한국 반도체 업계에는 이득이란 얘기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어느 한쪽 요구에 응하는 순간 반대쪽은 적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가 굳이 무리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라며 “무대응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하는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가 단순히 산업계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알력다툼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며 “기업 입장에선 상황을 살피며 최대한 이득이 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